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04 - 주님은 내 곁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1:2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희 집이 산 중턱에 있어서 도심이 내려다보이는데요. 어느 순간 온 풍경이 푸른 물결로 꽉 차있더라고요. 겨우내 마른 가지만 있던 나무들에는 어느새 푸른 잎사귀들로 가득해서 새삼 놀랐습니다. 그게 순간이었거든요. 제가 못 본 것일까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잎이 떨어지고 휑한 가지들만 남아있는 숲을 보며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더라고요. 이제 나무들이 다 죽고 잎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정말 1도 하지 않았더라고요. 왜냐하면 저는 알았던 거죠.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고 생동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계절마다 반복하며 저는 나도 모르게 믿고 있었던 거죠. 믿음이 그런 거겠죠. 흔들리고 아프고 어렵고 낙심되어도 또다시 필 새로운 잎과 열매를 기대하며 걱정하지 않는 거. 오늘도 그 믿음의 향기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요한일서를 이제 막 읽기 시작했죠. 오늘 본문까지 하면 고작 두 절을 읽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메시지를 읽게 되죠. 그것은 '보았다' '들었다' '만졌다' '나타났다' 등의 현실적 표현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특별히 강조되죠.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 요한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을 집필한 저자죠. 그런데 그의 저작들은 다른 복음서와 시기적으로 좀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가 보통 기원후 60~70년경 쓰인 것에 비해 거의 30년 정도 늦은 90~100년 경에 쓰였기 때문이죠. 추측건대 사도요한의 나이 90세 즈음에 쓴 글들이라는 거죠. 그가 늦은 나이에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자신의 살아생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랬던 그가 늦은 나이에 글을 쓴 이유는 또한 죽기 전 자신의 기억들을 기록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강력한 저작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 기독교를 강타하고 있던 영지주의 때문이었죠. 영지주의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포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 사상 속에는 의미 있는 것도 있고, 또 잘못된 사설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아마도 가장 어처구니없지만, 또한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사설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가현설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실제 하는 인간 예수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이미 영과 육의 분리를 주장하며 거룩과 세속으로 구분했던 영지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가 아닌 환상 가운데 보인 예수로 주장했던 것이죠. 의외로 초대교회에서 이 가설이 힘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사실을 반박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이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들과 그분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적 주장들을 깊이 있게 묵상할 필요는 없다고 느낍니다. 또한 그럴 실력도 부족하죠. 다만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이런 잘못된 신학의 뿌리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는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는 다른 영역으로 생각할 때가 많죠. 마치 삶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교회는 교회고, 직장은 직장인 모습이 많습니다. 이는 비단 이중적인 신앙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삶의 문제 앞에 걱정과 고민, 염려와 절망을 갖는 것 또한 우리의 신앙과 삶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신앙은 삶입니다. 믿음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거예요. 겨울철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봄이 되면 어떻게 잎이 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살아 숨 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듣지 못해도 괜찮아요. 다만 매년 봄철, 새롭게 피어나는 잎들을 본 사람이라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그 계절의 변화를 느낀 사람이라면,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어떤 일에든지 기뻐하고 웃을 수 있는 자에게 더욱 기회가 많이 찾아온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믿습니다. 내가 알기에, 보았기에, 느꼈기에, 경험했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렇게 믿음은 내 곁에 있습니다. 감정과 기분, 분위기와 느낌 가운데 있어요. 주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내 곁에 계십니다. 내 살에 느껴지는 바람처럼, 나도 모르게 웃음 짓는 기분 좋은 감정처럼, 어딘가 모르게 따스하고 포근한, 그래서 안심이 되고 의지가 되는 그런 분위기 속에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실체죠. 오늘도 기분 좋은 분위기와 감정 속에 거하시는 주님을 경험하시길 바래요. 편안한 분위기와 밝은 미소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증거 하는 여러분 되길 기도합니다. 

https://youtu.be/wGe6jl7bCKY?si=19XZeLUpfb69BKTf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