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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요나05 -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요나 4:1-5

성경의 인물들은 우리에게 때론 정면 교사로,
때론 반면교사로 다가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인데요.
요나는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니느웨는 요나의 입장에서는 원수와도 같은 적국입니다.
그런 나라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죠.
저는 그가 원수인 니느웨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서
도망쳤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요나가 그렇게 겁쟁이는 아니거든요.
그가 정말 니느웨에 가기 싫었던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니느웨가 정말 "회개할까 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까 봐"였어요.
그 이야기는 자신의 마음에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원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요나가 우여곡절 끝에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못해 회개를 선포하죠.
회개를 선포한다는 것이 말이 좋아 회개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질하는 거잖아요.
당연히 반발과 저항, 더 나아가 돌멩이가 날아와야 할 상황인데요.
니느웨는 즉각적인 회개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적어도 3일 밤낮을 돌아다녀야 겨우 니느웨를 한 바퀴 돌 수 있는데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니느웨 전체에 회개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의 사역적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성공임에 틀림없죠.
그러나 요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사역은 했지만 결코 니느웨의 구원을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님께 원망하죠.

이 원망은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는 원수의 나라는
멸망해야 하는 것이 답이죠.
그렇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위협이 되기 때문이고요.
아니나 다를까 훗날 요나의 모국은 적국 니느웨에 의해
멸망하게 되기도 하죠.
이런 생각을 하면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수 있죠.
그런 원망이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딱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어려운 이웃을 책임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죠.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나보다 더 나아지기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나보다 더 행복해지고,
나보다 더 많이 얻고, 더 높은 자리에 가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돕는 이웃이 나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요나와 같은 우리의 이중성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내 이웃이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십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사실 나보다 남이 더 잘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원수조차도 더 잘 되기를 바라라는 명령 아닙니까?
그것도 나를 통해서 말이죠.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는 한데
자신의 이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죠.
남을 도와도 적당히, 사역을 해도 적당히 합니다.
언제나 나는 돕는 위치, 남은 도움받는 위치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역을 하죠.
결코 나보다 더 잘 되기를,
나보다 더 나아지기를 꿈꾸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억울해하죠.
그것이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고요.
원수일지라도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라고요.
비록 내가 죽음의 자리에 놓일지라도
이로 인해 구원받는 이들이 세워지기를 꿈꾸라고요.
그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요.
우리가 제자로 세워질 때 우리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시는 특권을 받을 것입니다.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으로 머물지 마세요.
주님이 온몸을 던져 책임지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주님이 애달프게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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