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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요나서묵상09]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욘4:7~11

7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8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1.

우리교회의 정식 명칭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아름다운주님의교회입니다.

뒤의 이름은 우리 교회의 이름이고요.

앞에 붙은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우리가 속한 교단을 의미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감리회]는 장로회나 침례회, 성결교 등과 같은 교파입니다.

[대한]이라는 말은 한국에 속한다는 의미이죠.

[기독교]라는 것은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죠.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의 한자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는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시면서 시작된 거죠.


2.

초대교회는 많은 수난과 고초를 겪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많은 다신론과 범신론의 물결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주장해서 고초를 당했고,

힘과 정복의 논리 속에서 사랑과 평화를 외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고, 내쫓겼습니다.

이유는 하나에요.

그들은 사회 구조적 모순을 깨고, 견고한 욕심의 진들에 저항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집 노예들을 놓아 주면서 사회제도에 도전했고,

서로 사랑하고 재물을 나눔으로써 단단한 계층구조를 흔들었습니다.

본래 기독교는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웃과 생명을 억압하는 어떤 사회 모순과 악습에도 항거했습니다.


3.

이후 기독교는 1,000년 동안 암흑기를 걷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중세 기독교의 암흑기라고 하죠.

이렇게 기독교가 암흑기를 걷게 된 이유를 아십니까?

기독교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권력과 같은 길을 갔기 때문이죠.

중세기독교의 관심은 서민이 아니라 권력이었습니다.

중세기독교의 길은 이웃과의 나눔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었죠.

성경을 독점했고, 권력자와 권력을 공유하며 서민들을 지배했습니다.

축복을 밀미로 부를 취하고, 면죄부를 팔아 탐욕을 극대화 했습니다.


4.

이 암흑기를 깨뜨린 것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중세기독교의 탐욕과 지배와 착취에 항거한 도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득권에 도전하면서 처형되고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층과 착취,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며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은 성취되었습니다.

드디어 개신교가 출발한 것이죠.

이로서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민이 평등함을 외쳤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선포했죠.

종교개혁은 사회질서에 대한 혁명이었습니다.


5.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은 많이 닮아 있죠.

많은 사람이 죽었고요.

당시 사회, 정치 기득권에 도전했으며, 잘못된 사회 제도를 변혁시켰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했고, 차별을 받는 계층의 구조를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보다 타인에 대한 나눔과 배려, 사랑을 실현했습니다.

이것을 사회학적 용어로 타자인식이라고 하는데요.

바로 이웃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입니다.


6.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라 함은 우리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 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배자나, 심판자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 오셔도 별 상관없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오셨다구요.

그분의 오심은 단순히 어떤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의 오심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희생의 오심입니다.

바로 타자인식의 실현인 셈이죠.

기독교의 기본은 바로 이 타자인식입니다.


7.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서로가 타자에 대한 인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타자인식은 바로 사회적 영성입니다.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유흥비 마련을 위해 남의 돈이나 생명을 빼앗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기업은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 유독물질을 사용한 제품을 만듭니다.

자신의 자녀에게는 결코 먹이지 못할 음식을 만드는 회사도 있습니다.

썩은 밀가루를 가공해 맥도날드등 유명 패스트푸드점에 납품한 회사도 있죠.

재벌은 평생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를 당해 암에 걸린 이들에게 고작 내민 돈이 단돈 500만원이었지만 자신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서는 200억도 선 듯 내놓기도 합니다.

지난 주, 설교했던 황교안총리는 이번주에 어김없이 한건했습니다.

영구임대주택단지를 방문하면서 주차된 주민차량을 치우도록 경찰을 동원해 압박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항의를 받는 사태에 이르렀지요.  

왜 이런 문제들이 있을까요?

바로 타인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보통 우리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서 사랑 많다고 하죠.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죠.

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봉사는 할 수 있습니다.

학습된 봉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 봉사는 대부분 단체나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오는 봉사입니다.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결과로 평가받지 못합니다.

오직 중심에 타인에 대한 인식이 변화 했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죠.


8.

오늘 본문은 요나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제까지 박 넝쿨 잎으로 인한 그늘에서 시원함을 느끼던 요나였는데요.

밤새 벌레 한 마리가 박 넝쿨 잎을 다 갉아 먹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다음날이 되니 요나에게는 따가운 햇볕이 그대로 쬐었죠.

뿐만 아니라 동쪽에서 뜨거운 바람도 마침 불었습니다.

요나는 정신이 혼미할 만큼 무더위에 지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죽고싶다를 달고 사는 우리네와 닮았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차라리 다 그만두자고 소리치는 우리네와 닮았죠.


9.

이렇게 못난 투정을 부리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나서4:10~11,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박 넝쿨 잎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아까워하면서 자신과 상관 없다고 십수만명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는 요나에 대한 질타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도 몰라요.

나에게 이로운 사람들에게는 간까지 내주면서 나와 상관없는 이들은 죽든 말든 아무 관심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향하신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성탄절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하는 말씀인지도 몰라요.

막10: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10.

우리교회에 무료교육기관인 다림교육이 있는 것은 다 아시죠.

교육으로 재능기부를 하며 교육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일하죠.

지금까지는 교육기관으로 가르치고 함께 배우는 일만을 했는데요.

얼마전부터 반찬나누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우리 권사님들이 늘 수고를 해 주시는데요.

이전에 생각 못했는데 우리 권사님들도 다림의 교사들이시더라구요.

그런데 지난주, 다림교육 혜영샘이 글을 하나 올려주셨어요.

그 작은 반찬, 그것도 일주일이 겨우 한번 하는 일인데요.

그 반찬을 받으시는 할머니 한분이 다림교육에 빵을 사들고 오셨데요.

그것도 손주녀석 꿈나무카드로 말이죠.

꿈나무카드 아세요?

어려운 가정 아이들에게 매월 얼마씩 생필품을 사도록 지급되는 카드인데요.

그것을 가지고 빵을 사서 저희에게 가져오신 겁니다.


11.

어떤 분은 그래요.

교회가 별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일을 하냐고.

최근엔 불도 났다면서 무슨 오지랖이냐고...

어떤 이들은 이런 말도 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끈끈한 것도 아니고, 신앙훈련이 잘 되어보이지도 않는데 교인 훈련이나 잘 시키고, 교회에 충성하고, 예배 안 빠지는 교인이나 만들지...

그런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찔리고 아프기도 하죠.

그런데 저는 오늘 성탄주일, 주님의 오심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분은 이 땅에 이웃을 위해 오셨다고요.

그분의 복음은 이웃을 위한 것이었다고요.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22:39,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마10:42,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25:30,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눅10: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요15: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배우면서 새로운 타자인식을 가졌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새로운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타자인식의 변화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타자인식의 발로이기 때문이죠.

그분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편도 아닌 우리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그분은 마음에 들지도 않는 우리들을 위해 오셨고요.

그분은 구원받을 아무런 조건이 되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반응과 상태와 행동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에요.


13.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제가 아쉽다고 이야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킬 계명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막12:29~31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것을 기독교의 정체성이라고 하는데요.

첫째는, “개인적 영성”이고, 둘째는 “사회적 영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 개인적인 고백이 없다면 그것은 미신이나 다를 바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본문에서 첫째와 둘째라는 표현은 순서나 순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분류로써, 둘 다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인데요.

그 다음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것을 사회적 영성이라고 합니다.


14.

외람되게도 미국교회에서 우리가 영향 받은 것은 편협적인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개인적영성에 관한 영향은 많이 받은 반면 사회적영성에 대한 영향은 덜 받은 것이죠.

이유는 미국의 역사에서 잘 나타납니다.

미국은 노예제도 문제 때문에 감리교, 장로교 할 것 없이 다 분열했습니다.

미국북부가 농업위주인 반면, 남부지역은 주로 농사, 목화재배를 했는데요.

이 농사가 쉽지 않아서 노예 없이는 일굴 수가 없었습니다. 

노예제도라는 비인간적 제도에 대해 교회가 분열했고, 남부교회들은 이때부터 사회적 영성을 잃어버리고 개인적 영성에만 매달리는 결과를 낳았죠.

집에선 노예를 억압하고, 교회에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게 된 거죠.

기독교의 큰 축인 사회적 영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15.

오늘은 예수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이날 요나서의 마지막을 읽고 있는데요.

요나서의 마지막 대목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질문에 대한 요나의 대답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죠?

이 질문은 “네게 이로운 박덩쿨 잎은 그렇게 아까우면서 수십만명의 이웃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말이냐?”라는 질문이죠.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나의 대답이 무엇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잘 모르겠더라고요.

대신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요나의 대답이 없는 이유가 있겠구나하는 생각 말입니다.

바로 오늘 요나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답해야 하는 것이죠. 

이제 여러분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너의 감정은 끔찍이 생각하면서 남의 감정은 죽든 말든 상관없느냐?”

“너의 가족은 끔찍이 생각하면서 남의 가족은 죽든 말든 상관없느냐?”

“너의 교회는 끔찍이 생각하면서 지역의 이웃은 죽든 말든 상관없느냐?”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적인 영성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지만 그래도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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