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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요나04 - 반드시 기회는 다시 옵니다. 요나 3:1-10

어젯밤 우리 축구국가대표팀의 월드컵 경기가 있었는데요.
보셨나요?
우리 대표팀이 지난 대회 우승팀이자 세계랭킹 1위인 독일을 꺾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16강행은 좌절되었지만 정말 훌륭한 경기를 했다는데 모든 국민들이 박수를 보내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 경기들을 다 챙겨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몇몇 경기를 보았는데요.
그중에 해설을 하는 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축구경기를 하다 보면 멋지게 들어가는 골들도 있지만 우연히 들어가는 골도 있죠.
가령, 골키퍼가 걷어낸 볼이 달려오는 공격수에 맞아 골이 된다든지, 혹은 문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하필 골이 공격수의 발 앞에 떨어져 골을 넣는 경우가 종종 있죠.
이런 상황에 대해 해설가가 말하기를, 운도 경기의 일부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의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운이라는 것이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열심히 뛰었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도 따른다는 거죠.

이제 축구를 보시는 분들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어요.
예전에는 이기는 데만 급급해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면 비난하기 십상이었는데요.
요즘은 지더라도 잘 싸우고, 열심히 하는 모습에 열광하고 만족하는 수준이죠.
어제의 경기가 딱 그랬던 것 같아요.
승리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에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을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전반전이 끝날 때 드는 생각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져도 손뼉 치고 싶다'였으니까요.

어제 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여러 차례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여줬는데요.
아깝게 놓친 기회들이 몇 번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이 '만약 기회를 놓쳤다고 공격수가 낙심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공격수들은 기회를 놓쳐도 다시 일어나 또 공격을 하죠.
여러 번 그렇게 골문을 두드리다 골을 얻죠.
혹은 넣지 못한다 해도 다음 경기를 대비하며 또 기회를 노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요나서에서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보다,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대목이 있었어요.
바로 1~2절 말씀입니다.
요나 3:1~2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이 말씀은 1장에도 나옵니다.
요나서의 처음 시작이 이렇게 되죠.
요나 1:1~2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말씀은 똑같지만 그 말씀을 듣는 요나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처음 들었을 때와는 달리 두 번째 들었을 때의 요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죠.
그때, 이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제 가슴에도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거든요.
"반드시 기회는 다시 온다."

여러 차례 드린 말씀입니다만 우리를 유혹하는 이들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이것이 마지막이야. 이것을 놓치면 너는 영영 얻지 못할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죠.
용서라는 것이 기회를 얻는 것 아닙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다시 기회를 주시는 마음 아닙니까?
베드로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 또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포기할 뿐이죠.
하나님은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기회를 또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기회는 주어진다는 것이죠.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할까 봐 도전하기조차 두려워하죠.
그런데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를 경험할 때 마치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죠.
마치 내가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신 것이라고 여기는 거죠.
우리는 요나에서 배우는 바가 있습니다.
요나의 실패, 즉 그가 바다에 던져지는 절망은 누구 때문입니까?
그는 무엇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가야 하죠?
그것은 모두가 요나의 생각과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이나 요나를 포기하신 것 때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요나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은 또 다른 기회를 여십니다.
우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절망은 우리의 욕심과 버려야 할 것 때문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사명과 목적, 그리고 그분의 마음이 포기된 것은 아니죠.
오히려 우리가 절망의 나락, 마지막인 것처럼 여겨지는 고난은 하나님의 마음과 기회의 또 다른 시작인지도 몰라요.
우리에게 주어진 실패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포기가 아니죠.

저는 수없이 많이 실패했고, 지금도 실패하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제게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절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아프고 쓰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아요.
그래도 그 과정 가운데 배우고, 자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중 중요한 하나를 나누자면 이런 것입니다.
그런 실패를 경험하면서 “예민하지 말자”는 거였어요.
너무 “진지하지 말자”는 거죠.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절망 앞에서 너무 진지했드랬어요.
아픔과 고난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이죠.
그랬더니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진지함의 극치는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 앞에서 너무 진지하지 마세요.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세요.
오히려 조금 유머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습게 받아들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고요.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떤 결과가 오는 줄 아세요?
경직되고 분노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16:19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롬 16:19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악한 일에 순진하라는 구절의 순진은 개역 개정본에는 미련이라고 되어 있죠.
헬라어로 [아케라이오스]인데요.
이 뜻이 ‘섞이지 않은’, ‘꼬이지 않은’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예민하거나 진지하게 받지 말라는 의미죠.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회는 다시 옵니다.
또다시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에게 주어지고요.
또다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미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아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다시 우리에게 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기회는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믿음은 고난 가운데 빛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기다림 속에 자라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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