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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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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묵상 100 - 착한 일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본질인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41:1-18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의 연속입니다. 요하난의 첩보가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죠. 그달리야가 그렇게 믿었던 이스마엘은 그달리야와 그의 친위부대를 다 죽이고 암몬으로 도주합니다. 그가 암몬 왕의 사주를 받아 행한 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죠. 여기서 어제 본문에서 이해 못 할 의문이 하나 풀립니다. 그것은 그달리야가 왜 그리 근거도 없이 이스마엘을 믿었나 하는 점이었는데요. 1절에 보니 이스마엘이 왕족이었다고 되어 있네요. 그러니까 왕족이 반역을 하겠느냐? 생각했던 것이겠죠? 아무튼 이스마엘은 그달리야를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그달리야의 시대는 남유다의 총독이 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서 막을 내립니다. 이런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암몬은 패망한 남유다를 점령..
예레미야서묵상 99 - 근거없는 낙관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40:7-16 요즘 저는 하나님께 믿음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함께 선포하고 묵상을 나누고 있죠. 그중의 핵심은 감사와 순종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고 그 일이 나의 마지막이 아니며 그 끝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의 선하신 계획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감사하고, 모든 것을 좋게 보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죠. 우리의 앞에 놓인 문제 앞에서 우리는 때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과 너무도 다른 현실이 펼쳐지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에서 새로운 소망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을 사는 것은 우리들이죠. 그 현실에 묶여 과거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현실을 뚫고 내일을 살아야 합..
예레미야서묵상 98 - 나를 세우신 목적은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레미야 40:1-6 오늘 본문은 바빌로니아의 근위대장 느부사라단과 예레미야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빌로니아 군대의 총책임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왕이 느부갓네살이었는데 어찌 이름이 비슷합니다. 혹시 친족이지 않을까 싶은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중에 예레미야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만난 것이죠. 이 장면은 이미 39장에서 잠깐 언급되죠.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예우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빌로니아에서도 예레미야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예우를 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편을 들..
예레미야서묵상 97 -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방법, 그것은 좋은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9:15-18 오늘은 조금 뜬금없는 본문이 등장합니다. 갑자기 에벳멜렉의 이야기가 나오죠. 아시다시피 에벳멜렉은 38장에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혀 늪에 빠지려 할 때 구해주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시간을 거슬러 또 올라간 셈이죠. 이를 두고 신학자들은 예레미야의 글들이 부분 부분 짜깁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죠. 어쩌면 조각난 글들이 이어질 때 틀어졌거나 혹은 후대에 첨언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에게는 별반 흐름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다소 늦었지만 주님의 말씀이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이때,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나오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에벳멜렉이라는 이름은 파자하면, 에베드(종) + 멜렉(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왕의 ..
예레미야서묵상 94 - 예레미야와 시드기야. 우리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레미야 38:1-13 연구대상 시드기야의 이야기가 또 이어집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했다가 살리라고 했다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불러 또 묻습니다. 이번에도 솔직히 말해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처음에 거절하죠. 예레미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죠. 솔직히 말해 달라고,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며 삐지고, 상처받고, 미워하고, 심지어 저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거면 왜 말해달라고 했을까 싶기도 하죠. 이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고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고, 말씀을 들을 힘이 없기 때문이죠. 갈망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
예레미야서묵상 96 - 오늘도 눈 앞의 이익에 눈 멀지 마세요. 예레미야 39:11-14 바빌로니아의 침공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근위대장에게 예레미야에 대한 처우를 언급합니다. 근위대장이란 표현이 있지만 아마도 이는 전쟁의 선봉장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에게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선대 하라고 말하죠.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첫째는, 어떻게 예레미야를 느부갓네살이 알았을까 싶고요. 두 번째는 왜 그를 선대 할까 싶습니다. 상상이 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의 대결이어도 전쟁은 전쟁입니다. 그 안에는 전략이 있고, 탐색이 있을 수밖에 없죠. 당연히 바빌로니아도 남유다 침공을 염두에 두었다면 탐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가 눈에 띈 이유는, 그가 바빌로니아의 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
예레미야서묵상 95 - 인간은 하나님을 잃으면 반드시 썩는 존재입니다. 예레미야 39:1-10 드디어 남유다가 멸망합니다. BC722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지 130여 년 만에, 사실상 바빌로니아의 지배하에 들어간 BC605년의 첫 포로시대를 시작한 지 20년 만에 남유다가 완전히 망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그렇게 마지막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적들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나라의 왕이자 모든 정사의 책임을 지고 있는 시드기야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마치 세월호 때 승객들의 안전과 구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저 살자고 그것도 제일 먼저 도망치듯 빠져나갔던 선장의 모습이나 진배없어 보입니다. 시드기야는 제 눈으로 볼 때, 왕으로서 자질을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자질부터 부족해 보입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이 중요해 보입니다. 왕이란 자리는 혼자만의 자..
예레미야서묵상 93 -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확정한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38:1-13 연구 대상인 시드기야 왕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싫어한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백성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명목으로 예레미야를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 이때 시드기야의 반응을 보세요. "그가 여기에 있소. 죽이든 살리든 그대들 뜻대로 하시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대들에게 반대하겠소." 마치 연약한 이처럼 행동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권리를 마음대로 휘두르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은 힘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정말 힘이 없어서가 아닌 듯해요.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강한데 자신은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마치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이 죽였다고 변명하고자 하는 밑자락을 까는 듯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