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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138 - 나의 선택이 영성입니다.

고린도전서 16:19~24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다 함께, 주님 안에서 진심으로 문안합니다. 모든 형제자매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나 바울은 친필로 인사의 말을 씁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아멘.


좋은 아침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을 하죠.

 

엡 5: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오늘 아침 이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전에 죄인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천명하려 한 것으로 보이죠.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이 오늘 하루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을 알려주시는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전에 어둠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니죠. 문득문득 우리는 옛사람의 소리에 이끌리기도 합니다. 막막한 어둠이 나를 감쌀 때도 있죠. 여전히 우리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순간마다 때마다 그 선택은 우리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죠. 이 아침에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수없이 부정적이고, 의심스러운 상황들이 떠오릅니다. 절망스럽고 안 될 일들만 마음 가운데 가득 차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둠을 선택하면 어둠이 나를 가둬버리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서 빛의 자녀다운 행동을 해야 해요. 불가능이 몇 % 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 또한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 주님이 계시다면 그것이 옳은 길이고, 내가 선택한 곳에 웃음과 기쁨, 감사가 있다면 그 길이 바른 길이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다 실패라고 해도, 다른 기준들이 다 패배라고 말해도 나는 기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우리의 선택과 집중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를 발견합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죠. 특별히 바울은 온 교회를 대표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합니다. 튀르키예 지역 교회들과 다른 모든 지역의 교회를 대표해 안부를 전하죠.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들입니다.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라고도 부르죠. 바울과 함께 천막을 지으면서 선교의 사명을 다했던 인물입니다. 또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아볼로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길러낸 인물들이기도 하죠. 이런 인사는 그리스도 안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가족임을 알리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묶어주신 은혜의 공동체가 서로 기도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도 떨어져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묶어주신 공동체인만큼 기도와 관심, 격려와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는 가운데 주님의 역사하심이 임하는 공동체 되길 바랍니다.

 

친필로 인사의 말을 쓴다고 굳이 언급한 이유는 아마도 이 편지의 출처가 어딘지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도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대부분을 대필로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말하면 누군가 적어서 보낸 형식이죠. 그러다 보니 가끔 바울이 쓰지 않은 편지를 누군가 바울의 이름으로 보낸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아는 외경을 포함한 서신서에는 바울이 직접 쓰지 않은 편지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죠. 그래서 바울의 편지가 적게는 7권에서 많게는 13권에 이른다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다만 바울이 마음을 다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 표현을 받아들이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작 중요한 오늘 본문에서의 내용은 이 이후에 등장하죠. 바울은 뜻밖에도 저주를 퍼붓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고 외치죠.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라는 권면일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면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극단적인 표현을 할 때 반감을 갖게 되죠.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는 이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소위, 너의 생각만 옳으냐? 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혹은 혹시 나도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사람도 생길지 모릅니다. 

 

저는 바울이 이 말을 어떤 의도로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강한 어조의 말에 이어 곧바로 [마라나타!]라고 외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라나타]란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죠.

 

'너는 뒤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야 해, 뒤를 돌아보면 넌 큰일이 날 거야. 그러니 앞만 보고 걸어. 그러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만약 이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실까요? "그래, 앞만 보고 걸으면 돼!"라고 생각하실까요? 아니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혹시 뒤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실까요? 어떤 생각이 나의 마음을 채울까요? 아마도 앞만 보고 걸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몰라요. 앞만 보고 걷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다르죠. 두려움이 몰려올지 몰라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떨릴지도 모릅니다. 잘못될 것을 생각하며 걱정이 가득할지도 모르죠. 

 

참 이상하죠? 아무 문제없다고 한 것에는 우리의 마음이 잘 안 갑니다. 대신 문제가 있다는 말에 온통 신경을 쓰죠. 그러니까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생각하며 사는 것인지도 몰라요. 바울은 저주의 말과 주님이 오실 기대를 동시에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죠. 하나의 선택을 하면 다른 것은 떠 오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기대를 한다면 우리에게 저주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테니까요. 반면 걱정과 저주에 쏠리면 우리에게 기대는 사라집니다. 늘 잘못될 것만 생각하죠. 늘 혼날 것만 생각하고, 심판받을 일만 걱정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죠. 그분 앞에 서는 이들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심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분을 선택한 자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지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우리는 주님 앞에 가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 길만 걸으면 돼요. 그래야 어둠이 사라집니다. 그래야 걱정이 없어지죠. 그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걱정과 근심의 어둠이 몰려올 거예요. 사라지지 않는 유혹이죠. 또한 기대와 소망의 빛도 우리 앞에서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인격이 되고 영성이 되죠. 그 선택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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