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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64 - 우리의 기준은 ‘사랑’입니다.(요한복음15:1~17)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요? 가끔 성경을 읽다 보면 부분적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어떤 구절 일부를 떼다가 그것만을 집중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가 왜곡될 때가 있죠. 오늘 본문도 조금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는 말씀의 구절마다 제목을 달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의 제목에는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 제목이 맞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여서, 그 가지가 나무에 머물러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내용이죠. 그래서 제목이 그렇게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만을 놓고 보면 우리는 이 구절을 생물학적 의미로만 보게 될 때가 있어요. 뿌리가 되는 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머물러 있어야 온전한 사명과 사역을 할 수 있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하죠. 그런데 그 뿌리에, 나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저 예수님께 뿌리를 두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말씀이 아닙니다. 명확하게 뿌리에 머무는 방법과 열매 맺는 방법, 그리고 제자 되는 방법까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요. 그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것인 겁니다. ‘교회 안’이라는 물리적 장소에 머문다는 의미도 아니고, 교인이라는 증명서를 받는 것도 아닌,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남과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쫓아다닌다는 의미는 그분과 같이 이웃을 차별하거나 편 가르지 않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신분증으로 증명되는 것도, 등록증이나 어떤 특별한 예식에 참여하는 것도 아닌, 오직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된다고요. 그것이 나무에 머무는 가지의 의미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참 포도나무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혹시 눈치채셨나요?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제자의 본분을 찾고, 다른 것으로 제자를 증명하려고 할 때, 예수님은 계속 한 가지 사실만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죠. 적어도 만찬 이후에 그분의 모든 말씀의 주제는 바로 ‘서로 사랑’이었다고요. 그것으로만 제자가 증명되고, 그것으로만 능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운동을 하다 보면 실패하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어떤 운동이 좋을까를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이 운동을 하다 보면 어디선가 효과 없다는 말이 들리고, 저 운동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운동이 더 좋다는 말을 듣게 되죠. 그때마다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닙니다. 그렇게 잘 쫓아다니면 좋은데 그러다 지쳐서 다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한 가지라도 꾸준히 하자는 거예요. 저는 스쿼트만 하는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팔 굽혀 펴기만으로도 충분해요. 더 바라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요. 보통 그저 구호로 사용하죠. 서로 사랑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싶죠. 그런데 해 보세요. 직장 상사나 동료들이 어떤 사람이어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해 보세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상이 나를 실망시켜도 그저 사랑해 보세요. 어떻게 될까요? 짜증 나고 힘들고 감정이 상해도, 내 안에 남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 보세요. 나의 심령은 어떻게 변할까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죠? 내 안에 작은 사랑을 품는 일이 어쩌면 가장 위대한 영적 가치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있으시죠? 제가 맞춰 볼까요? ‘그게 잘 안 돼요’ 이 말 아닌가요? 어디 팔 굽혀 펴기는 잘 됩니까? 실패가 없어요? 안 하고 싶을 때 많죠. 그러나 결국 넘어지고 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사람에게 근육이 주어지듯이, 잘 안 되고, 곧잘 옛사람이 드러나서 판을 깨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 사랑의 마음을 품는 사람에게 영적 변화가 주어지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영적 위인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왜 그리 이해심이 많은지, 왜 그리 이웃들에게 퍼주는지, 왜 그리 사랑하는지… 다 이유가 있죠. 그것이 하나님 영성의 기초니까요.

한 가지만 첨언하겠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판단하고 싶어 하죠. 정치든, 사회든, 사람이든, 일이든, 우리는 옳고 그름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판단과 결정의 기준을 정하려고 하죠. 여러분의 그 판단기준은 무엇인가요?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을 무엇으로 판단하세요? 사람을 무엇으로 칭찬하고 저주합니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상인가요? 인종이나 종교적 동일성인가요? 혹은 내 취향과 감정인가요? 저는 감히 말씀드리는데요. 그리스도인의 판단기준은 그저 ‘사랑’입니다. 내 안에 사랑을 잃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지 마세요. 내가 누군가를 저주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드는 소식이라면 듣지 마세요. 내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생각, 그것이 우리에게는 버려야 할 악입니다. 상대방도, 사회현상도, 경험적 철학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오늘도 사랑 가득한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 되시기를, 그래서 제자임을 드러내고, 열매 맺는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나는 하루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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