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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123 - 나를 흔들려는 목적에 가장 크게 복수하는 것은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1-11

드디어 예레미야의 마지막 장입니다. 내일이면 예레미야 묵상을 마무리하게 되네요. 마지막 장까지 매일매일 잘 묵상해 오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이렇게 끝자락에 오시니 어떠신가요? 시원섭섭하신가요? 저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예레미야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미처 몰랐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지나왔습니다. 3년 전인가요? 예레미야서를 설교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뭐 저는 그렇다고요.^^

46장에서부터 시작된 이웃 열방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 51장에서 끝나고, 52장은 다시 유다 왕국으로 돌아옵니다. 유다의 최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죠. 이는 39장과 연결되어 있어요. 시드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입니다. 시드기야는 남유다의 왕들 중 가장 위대한 왕인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는 남유다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이죠. 그런데 그의 아들 시대에 이르러 멸망의 기로에 섭니다. 그 아들 중에 세 명이나 왕이 되죠. 그러나 하나같이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악한 왕이 됩니다. 이 장면이 보면 볼수록 안타깝습니다. 이런 장면들이 성경에서는 곧잘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 그렇고, 사무엘의 아들 또한 그렇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이야기를 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받지 못한 아들들의 이야기들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게 영원한 숙제이기도 해요. 

아버지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먹을 것 사주고, 좋은데 데려가고, 함께 여행하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대신 되지는 않아요. 아버지들이 혼자 속으로 기도하는 것은 해도, 입으로 행동으로 기도하는 것 잘 안 하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귀한 일을 하셨는지, 얼마나 감사한지, 그런 고백들을 잘 안 합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그런 고백을 들려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녀들이 있을 때 다른 소리, 불평, 불만, 이런 것 말하지 말고, 감사의 고백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으로는 불평하고, 잔소리하고, 화를 내고는, 정작 미안한 마음에 뭐 사주고, 먹여주고 하며 퉁 치려고 해요. 내 안에 있는 마음, 특별히 감사와 은혜, 사랑과 축복의 말을 많이 하세요. 

다시 시드기야입니다. 아마도 그는 요시야의 늦둥이였던 것 같아요. 큰형인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 지 석 달만에 죽고, 작은형 여호야김이 왕을 하다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으로 세워졌으나 그 역시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고,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11년 동안 통치했으나 결국 바빌로니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죠. 멸망하는 왕국의 마지막 왕이기에 비참할 수밖에 없지만 특별히 시드기야의 최후는 매우 비참합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들이 처형을 당하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힌 채, 노예만도 못한 신분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는 신세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리 시드기야의 삶은 비참함으로 마무리되어야 했을까요?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당시 이미 남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속국 신세였습니다. 시드기야 또한 바빌로니아에서 세운 꼭두각시 왕이었죠. 그런데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한 셈이죠. 그래서 그는 은밀히 이집트와 손을 잡습니다. 이집트를 이용해서 바빌로니아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게 집니다. 그러니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입장에서는 반역자가 된 것이죠. 그 처절한 형벌은 이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해석이고요. 그렇다면 영적인 해석은 어떨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다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말이죠.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말씀하시죠. 너의 고통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요. 마치 내 안의 평안이 깨지면 외부의 조그마한 문제도 나를 넘어뜨릴 만큼 큰 문제가 되듯이, 내 안에 하나님을 잃으면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정답은 외부에서 찾을 수 없어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감사밖에는 우리를 외부의 힘으로부터 지켜줄 것은 없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세상에서 그들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수없이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들을 이기는 방법은 그 말을 없애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니 없어지지 않아요. 다만 내 안에 감사가 넘치면 그 상처들을 이깁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그 방법을 외부에서 찾습니다. 이집트를 끌어드려요. 이 또한 마치,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갚으려 하죠. 이것이 우리에게는 진리처럼 여겨집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너도 상해야 한다는 식의 반응을 추구하죠. 전쟁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후는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죠.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세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방법으로 몰려오는 공격을 주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입니다. 저주를 사랑으로 받고, 상처를 감사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그분의 도우심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성품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도 나를 흔들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여전할 것입니다. 상처투성이의 말들이 난무하고, 이기심의 욕망이 판을 치겠죠. 어쩌면 그 와중에 나도 더 큰 상처를 줄 말들을 준비하고, 남보다 더 많은 이기심을 가져야 살아남는다고 내 귀에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 속삭임에 속지 마세요. 우리의 승리는 그분께 있습니다. 그럴수록 감사하세요. 좋게 받아들이세요. 마음의 평강을 지키세요. 주님의 마음을 가지세요. 나를 흔들려는 목적에 가장 크게 복수하는 것은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좌절시키려는 목적을 깨버리는 길은 좌절하지 않는 것이고, 나를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려는 목적에 통쾌하게 되갚아줄 방법은 기뻐하고 감사하며 평강을 잃지 않는 것뿐입니다. 내일 인생의 종말이 온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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