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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열왕기상묵상

"이 밖에 내가 만나 볼만한 나의 자녀가 또 없느냐?"

열왕기상 22:1-9 "이 밖에 내가 만나 볼만한 나의 자녀가 또 없느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는 늘 앙숙이었습니다.
고대시리아는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죠.
히타이트와 아시리아로 이어지는 고대 강대국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멸망하는데요.
성경에 나오는 아람사람이 곧 시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쓰는 아람어는
예수시대 이스라엘의 통용어이기도 했습니다.

늘 견원지간이던 이들이 모처럼 평화스러웠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만났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이죠.
그 회담에서 북측 아합왕은 남측 여호사밧왕에게 제안을 합니다.
길르앗 라못이라는 곳을 뺏어오자는 것이죠.

길르앗 라못은 갈릴리호수 아래로 흐르는
요단강의 동편에 있는 땅입니다.
본래 가나안 정복시절 레위지파에게 주어진 땅이었는데요.
솔로몬시절에는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는
200년이 넘는 전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길르앗 라못은 시리아 손에 넘어간 거죠.
아합은 그것을 찾아오자고
유다왕에게 제안을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쟁을 하자는 제안입니다.

이때 여호사밧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응답은 정치적인 수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담 장소가 북이스라엘인 만큼
여호사밧이 아합왕의 체면을 고려해 응답한 거죠.
다만 여호사밧은 전쟁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에게 역 제안을 하죠.
이 전쟁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묻자는 겁니다.
그랬더니 아합왕이 예언자 400명을 불렀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들으려고 한 거죠.
예언자 400명은 한 목소리로 전쟁을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무언가 좀 찜찜했습니다.
400명의 예언자의 말이 옳은지 의심스러웠던 거죠.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이 밖에 우리가 물어 볼만한 주님의 예언자가 또 없습니까?"

예언자 미가야에 대해서는 내일 묵상하기로 하고요.
오늘 제게는 이 여호사밧의 질문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내일 읽을 본문에 보면
한 신하가 미가야를 모셔오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때 그 신하가 미가야에게 이렇게 말하죠.
"이것 보시오. 다른 예언자들이 모두 한결 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였으니, 예언자께서도 그들이 한 것 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13절)

이 말로 짐작컨대 예언자 400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다기보다
아합왕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합왕이 악한 왕이라는 증거는
그가 답정너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곧 답이 되었죠.
다른 이들의 의견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예언자에게까지 미쳤던 것이죠.

제가 이 말씀에 마음이 아팠던 것은
제가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설교하지는 않았을까?
혹시 나는 하나님의 생각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목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어디 그것이 목회자뿐이겠습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인데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부르셨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셔요.
"이 밖에 내가 만나 볼만한 나의 자녀가 또 없느냐?"
"이 사람들 말고 진정으로 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인생을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좌표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인간적 노력보다, 사회적 적응보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분의 뜻이에요.
오늘도 익숙한 세상의 이익이 아니라
오늘 내가 묵상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루를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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