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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요나서묵상03]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욘1:4~7

4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태풍이 일어나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5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마다 저희 신들에게 부르짖고, 저희들이 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다. 요나는 벌써부터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6    마침 선장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어서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리는지 알아봅시다."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1.

우리는 3주전부터 요나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요나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길을 묻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번 요나서 묵상의 설교 시리즈 제목을 정한다면 [요나에게 길을 묻다]가 될 것 같습니다.

요나를 통해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길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2.

잘 아시는 대로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적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갔다오라는 것도 아니고, 회개를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해 스페인으로 도망합니다.

이미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대로 이 도피행각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닙니다.

그게 그 일을 하기 싫어서가나 무서워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보통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안 될까봐 주저합니다.

무엇인가 도전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이 성취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죠.

그러나 요나는 그 반대였습니다.

자신의 사역이 성공할까봐 두려웠던 것이죠.

자신으로 인해 니느웨가 회개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유는 니느웨가 바로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의 적국이었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일반적인 사랑과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보통 아가페라고 불리는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아세요?

절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번역되는 아가페가 일반적인 사랑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 차이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는 거죠.

사랑에는 민족이나 성별이나, 계층이나, 그 어떤 차별도 없는 거죠.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은 진짜 사랑을 가르치고 계신 것인지도 몰라요.


4.

그 사랑을 모르면 결코 복음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복음이 왜곡되지요.

내 자녀, 나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죠.

그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해석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해석하는 이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그런데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바로 “나”, 조금 더 나아가면 “믿는 사람들”로 해석하겠죠.

그러나 세상은 믿거나 믿지 않거나 말 그대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하시죠.

하나님은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고 부정하는 인간들도 사랑하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외아들을 주신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롬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살아갈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복음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5.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함을 가지라고 말하죠.

긍휼함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기쁜 소식을 모르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한 거죠.

그런데 긍휼과 단순 불쌍함과의 관계에도 심각한 차이가 있어요.

진짜 긍휼이라는 말은 뭔지 아세요?

이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는 그런 마음이 아니에요.

몰라서, 마치 덜 떨어져서 불쌍하듯 쳐다봐요.

마치 돈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불쌍한 마음은 오히려 상처를 줍니다.

강남아줌마들이 봉사에 열심이죠.

나는 있으니까 좀 도와주듯이 말이죠.

그것은 긍휼이 아니에요.

긍휼은 아가페의 사랑을 품어야 가능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주님의 사랑을 모르면 전도도 못하는 거예요.

적국이라 할지라도,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을 잃으면 안 되는 거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국경이 없는 사랑을 품어야 가능해요. 

이것이 요나에게 묻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길입니다.

사랑을 잃지 마세요.

민족주의도, 사상이나 이념도 사랑보다 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니까요.


6.

이제 더 본문을 읽어가 보죠.

요나는 [욥바]라는 곳으로 갑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죠.

그곳에서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탑니다.

스페인까지는 먼 길입니다. 

주로 스페인으로 가는 배들은 튼튼하고 컸어요.

게다가 그 배들은 보석이나 금들을 거래하는 배들이 많았습니다.

그 배에 요나는 올라탔어요.

그런데 성경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배가 출항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큰 풍랑이 일었는데요.

그 큰 배가 깨질 것 같았다는 것으로 보아 정말 거대한 풍랑이 인 것이죠.

아마도 난리가 났을텐데요.

그런데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잠이 들었답니다.

얼마나 깊이 잤는지 성경은 ‘잠들다’는 표현을 히브리어 [라담]이라고 했어요.

[라담]은 “죽은 것 같이 고요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정말 죽은 듯이 자는 거죠.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 이렇게 잘 수 있는 것도 재주입니다.

그런데 왜 이 장면이 흥미로운 장면이냐??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세상이 난리 났는데 배 밑에서 죽은 듯 자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세요?

저는 이것이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땅의 악과 모순을 회복하고 타파하도록 보내진 오늘날의 교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세상의 문제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듯이 말이죠.


7.

성경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뱃사람들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욘1:5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마다 저희 신들에게 부르짖고, 저희들이 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다.


아마도 뱃사람이라고 기록된 이들은 요나와 대비되는 사람들이겠지요.

대입해서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요나라면 뱃사람들은 아마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되는 것이겠죠.

그 뱃사람들은 저마다 신들을 찾습니다.

그들도 아는 거죠.

이런 풍랑, 천지개벽은 신이 주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8.

더욱이 배를 살리려고 자신들의 짐들을 바다에 버리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그 짐들 중에는 값비싼 물건들도 있었겠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배에는 금은보화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신의 이익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릴 줄 압니다.


9.

때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믿는 사람들 같을 때가 있어요.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희가 모 재단에 내년도 다림교육 사업 프로포잘을 했어요.

된다면 많은 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여러분들께도 말씀드렸죠?

물론 몇몇 다림교육의 대표 어머니들께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한분이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하나님이 저의 기도도 들어주실까요?”

그분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에요.

“그럼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시면 들어주시죠. 그런데 무슨 기도를 하셨는데요?”

“목사님, 다림이 재단으로부터 지원 받을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아니 어떻게 기도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하나님이 다림을 도와주시고 계시잖아요. 지금까지 다림을 보았을 때 저는 그렇게 믿어져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어떤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거든요.

그 말을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서 들으니까 머리가 쭈뼛 서더라고요.

여러분에게 재단 지원에 대해 제가 기도요청을 드렸잖아요.

혹시 여러분, 기도하셨어요?

“그냥 어련히 되겠지, 그게 기도한다고 될 일이야?”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시지는 않았나요?


10.

제가 다림교육을 하다보니 사회적기업이나 단체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정말 놀라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사업의 이익금을 모두 환원하는 회사도 있어요.

정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나누는 거예요.

어떻게 수익을 전혀 내지 않고 회사가 돌아가느냐고 제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자신뿐 아니라 직원들이 회사를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은 수익이라는 거예요.

어떤 단체는 어머니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어려운 지역의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가기도 하죠.

정말 헌신적이다 싶을 만큼 나눔 단체들이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단체에서 교회 다니는 분들이 몇%나 될 것 같으세요.

그런 일들은 주로 예수 믿는 분들이 많을 것 같으시죠?

물론 제가 경험한 것들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제가 보고 느낀 바로는 채 20%가 되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소위 넌크리스찬들이었다고요.

그들이 훨씬 그리스도인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11.

오늘 뱃사람들은 배를 살리려고, 공동체를 살리려고, 다시 말하면 다 같이 살려고 자신의 것들을 다 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나는 뭘 하고 있을까요?

배 밑창에서 잠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위험함에도 골방에 처박혀 있는 모습 같아요.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는 무관심한 모습과 같아요.

오히려 자신만 편하고, 자신만 괜찮으면 된다는 식의 모습 같아 보여요.


12.

지난주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국교회는 사람이 없거나 지도자가 없어서 위기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열정이나 봉사, 참여가 없어서 위기인 것은 아니에요.

한국교회는 믿음이나 신앙이 부족해서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진짜 한국교회가 위기에 빠진 원인은, 그들이 믿고 고백하는 예수께서 진정 어떤 분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전하신 진리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기 때문이죠.

그들은 '우리'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바꿔버렸고,

'남을 향한' 사랑을 '나만을 위한' 사랑으로 바꿔버렸으며,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복음을 '종교적인' 복음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중심이죠.

우리는 그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오늘날 교회는 '내'가 중심인 기도로 바꿔버렸습니다.

내 목소리가 더 중요하고, 내 바람이 더 중요하게 만들어 버렸죠.

진짜 위기는 신앙의 본질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13.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죄악을 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들 또한 이 땅의 악함을 깨기 위해 세워졌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 혼자만 잘 되면 된다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교회들은 자기의 이권에만 관심하고, 목회자들은 자신의 권위만 유지한 채 세상의 흐름에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14.

자화자찬 같습니다만 저는 다림교육의 사역이 성공했다 믿습니다.

이미 많은 지역 분들에게 신뢰를 받고, 함께 마음을 모으고 있죠.

이 같은 결과에는 여러분들의 기도와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림교육의 사역을 교회를 위하거나, 우리의 명성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교회 부흥 때문이거나 이익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나타냈습니다.

다림사역을 하면서 많은 지역 부모님들이 교회에 호의적이 되셨는데 저는 단 한분도 이 교회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역 교회를 소개해 드렸어요.

저는 분명히 이 사역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선포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지, 교회 때문은 아니란 것을 보여줬어요.

거기서 많은 분들이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15.

객관적으로 볼 때, 교회가 한국에서 하는 일들은 많습니다.

많은 봉사를 하고, 나눔도 하고, 많은 재정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많은 교회가 전도를 자기들을 위해, 자기교회를 위해서 합니다.

봉사나 나눔도 자기들을 위해서 합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봉사는 안 하는 것이죠.

그것은 나눔도 봉사도, 심지어 전도도 아닙니다.

교회가 수많은 봉사와 나눔을 하면서도 세상에 지탄 받는 이유입니다.


16.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수도원이 아닙니다.

세상과 등지고, 세상과 싸우고, 세상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풍파에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세상을 개혁하며 이끌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심어진 이후, 가난한 자들에게 삶의 기회를 만드는데 힘썼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해 심시일반 모아 학교를 세웠습니다.

배재, 이화, 배화, 경신, 정신, 연세 이런 학교들입니다.

병든 자들을 위해서는 병원을 세웠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독립선언 33인 가운데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교회는 이 나라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등지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풍파 앞에서 잠들면 안 됩니다.

이것이 요나에게서 묻는 두 번째 길입니다.


17.

오늘 마지막으로 요나에게서 또 다른 길 하나를 물어보죠.

뱃사람들은 이런 재앙이 분명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라고 직감합니다.

그런 난리통에 요나를 발견한 뱃사람들은 요나를 깨웁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누구의 잘못인지를 알아보려고 하죠. 

역시 요나가 그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요나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죠.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18.

문제의 해결에 첫 단추는 자복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먼저 바라보고, 거기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죠.

요즘 한국정치 문제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그런데요.

저는 대통령께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과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현재 지지율 5%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솔함이 드러났다면, 자신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하면 자신이 진짜 죽거나, 버려질 것 같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가치관에서는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자신을 고백하고, 자신의 문제를 주님께 내놓을 때 주님의 해결책이 임하죠. 


19.

그러나 자복에는 뒤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복을 입으로만 합니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의 내용대로 살거나 행동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만 하고 맙니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죠.

그러나 기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기도는 제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요나의 자복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어요.

그는 자신을 던집니다.


20.

놀랍게도 여기서 극적인 대비가 또 등장합니다.

많은 뱃사공들은 자신의 가진 것만을 던졌습니다.

마치 자신의 소유인 돈이나 재물, 가진 것들을 던지듯이 말입니다.

우리들은 많은 시간과 재물과 열정을 가지고 나눔을 합니다.

특별히 그런 나눔들이 곧 사랑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진 것도 없을 거예요.

그는 대신 자신을 던집니다. 

욘1:12,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21.

여러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단순히 목숨을 던지란 이야기가 아니에요.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62:5~6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것, 나의 희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은 나를 버려야 가는 한 것입니다.

내 뜻을 버려야 하나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진 것만 내놓는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버려야 합니다.

반찬 몇 개 나눈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버려야 합니다.


주변의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일하십니다.

요나가 자신을 던지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잖아요.

예수께서 자신을 던지시니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잖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주변 것들을 원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나’뿐입니다.

나의 마음뿐이에요.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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