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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그리스도인은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요나서묵상02 그리스도인은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욘1:1~3

1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욥바로 내려갔다. 마침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를 만나 뱃삯을 내고, 사람들과 함께 그 배를 탔다.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갈 셈이었다. 

 

1.

성경은 구약39권 신약27권, 총 66권으로 되어 있죠.

어릴 적에 저는 이것을 3*9=27로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이 외에도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역사적인 교회가 많은 신학적인 논의와 회의를 통해 경전으로써 66권의 성경을 정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66권의 성경 외의 경전을 외경이라고 부르죠.

그런데요.

가톨릭성경과 개신교성경의 구약성경 권수가 좀 달라요.

개신교 구약성경이 39권인데 비해 가톨릭에서의 구약성경은 46권이죠.

7권이 더 많습니다.

이 사실을 혹시 알고 계셨어요?

혹시 “가톨릭도 성경을 쓰냐?”고 질문하는 분은 안 계시겠죠?


2.

어떤 분이 이단인 “하나님의 교회”도 성경을 쓰냐고 묻더군요.

이단도 똑같은 성경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신천지도, 통일교도, 여호와의 증인도 똑같은 성경을 쓰죠.

그중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을 조금 고쳐서 사용합니다.

몰몬교하고 있는데요.

한국에 와서 양복입고 외국인들이 무료 영어공부 가르친다고 하는 분들요.

미국의 유타주는 몰몬교도들의 주인데요.

그곳은 대학생이 되면 1년씩 꼭 해외 선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는 분들이 많고요.

다는 아니지만 한국에 오래 정착하고 한국말 잘하는 분들, 특히 방송에 많이 나오는 분들은 이런 연유로 오신 분들이 꽤 많죠.


3.

오해는 하지 마세요.

천주교 가톨릭을 이단과 동일선상에 놓고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톨릭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개신교인 가운데 많으신 것 같아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고 생각하셔요.

가톨릭은 유대교쯤으로 생각하시죠.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대하죠.

가톨릭은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초대교회가 바로 지금의 가톨릭이죠.

개신교는 그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은 개신교의 모태정도 되는 것이죠.

다만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른 이유로 한 가지만 거론한다면 그것은 [만인제사장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영접한 모든 사람들이 곧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영과 속의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속의 자리가 사명의 자리가 되니까요.

그에 비해 가톨릭은 영과 속의 구분이 확실하죠.

그래서 제사장의 권위가 지속되고, 그들의 죄사함의 권위가 있는 거죠.

고해성사라는 것이 그것인데요.

신부가 죄를 사하죠.

오직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외의 개신교가 인정하기 힘든 몇 가지 교리적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적 차이는 개신교 교파마다도 차이가 있죠.

저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낙인찍는 시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대차이가 나는 형제나 부모자식 관계에서 나타나는 생각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화합과 일치를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4.

암튼 가톨릭의 구약성경은 우리의 성경보다 7권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번역 상에서 나오는 문제예요.

너무 공부하는 듯한 인상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상식적인 차원으로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설명 드립니다.

구약성경은 본래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그 성경이 24권입니다.

그런데 성경번역에 가장 중요한 번역본인 70인역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셉투아진타(LXX)라고 하죠.

히브리 12지파 대표학자들 70인이 모여 구약 히브리성경을 그리스말로(헬라어죠) 번역한 것입니다.

이때, 구약성경 24권을 39권으로 늘렸어요.

첨가가 된 것이 아니라 상하권으로 나눈 책들이 있어서 그렇게 된 거죠.

초대교회는 구약을 사용할 때 바로 이 70인역을 사용했어요.

그러니까 구약 39권이 된 것이죠.


5.

그런데 문제는 이 셉투아진타에는 히브리어성경 24권에 있는 책을 번역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책도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토빗기를 비롯한 7권이죠.

초대교회는 70인역을 사용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7권을 포함시킨 겁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가톨릭에 내려온 것이죠.

그에 비해 1500년경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개신교가 출발했잖아요.

그때, 종교개혁자들은 70인역에 있는 7권을 뺀 히브리어 성경만 인정했어요.

그래서 개신교 구약성경은 39권이 된 것입니다.


6.

좀 정신이 어지러우신가요?

그냥 그렇다구요.^^

조금 더 공부를 해 볼까요?

이 39권의 구약성경도 장르들이 좀 다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4개의 카테고리로 정했는데요.

그 카테고리의 구분은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입니다.

보통 모세오경이라고 불리는 [창,출,레,민,신]를 우리는 율법서라고 부르죠.

여호수아서부터 에스더서까지를 역사서라고 부르고요.

욥기, 시편, 잠언과 전도서, 아가서를 시가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머지 17권을 예언서라고 하죠.


7.

예언서도 보통 2종류로 나누는데요.

이사야서부터 다니엘서까지를 대예언서라 부르고요.

나머지는 소예언서라고 부르죠.

분량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나서는 소예언서에 속하는 책인 셈입니다.


8.

너무 길게 요나서의 전 이해를 이야기 한 것 같네요.

이 시기에 우리가 요나서를 읽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교인들의 이기주의를 질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교회가 개인적인 성취를 위한 이기적공동체가 된 원인은 뭘까요?

저는 단순히 그것이 개인의 인격이나 성품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의 목사, 한사람의 교인의 잘못이 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교회나 여러분들이 믿고 고백하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미처 알지 못하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전하신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믿기 때문인 것이죠.

아까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이 많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분들 가운데는 가톨릭적 개신교인들이 너무 많아요.

가톨릭과 개신교의 근본 차이가 [만인제사장교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개신교인 가운데는 목사를 마치 제사장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요즘은 오히려 개신교가 더 가톨릭 같습니다.

영성훈련이라는 것이 개신교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요.

이것이 대부분 다 가톨릭에서 나왔어요.

그러면서도 가톨릭을 이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죠.

문제는 그런 영적인 유행들이 가톨릭의 유산이라는 것을 모르는데 있어요.

중세 암울한 시대 세상을 저버리고 내세만 추구하던 수도원영성이 그 모태라는 사실을 누구도 몰라요.

그 영성훈련이 유럽의 기독교를 타락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라요.

 

9.

저는 교파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교파를 나눠 설명하지 않습니다.

감리교 목사이지만 저는 감리교 믿는 목사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목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하자면,

감리교는 본래 장로라는 직제가 없었어요.

감리교에서 장로는 목회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왜 만들어졌는지 아세요?

다른 교단에서는 장로가 있는데 우리는 없으니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거죠.

마치 다른 나라에는 왕이 있는데 왜 우리는 없냐고 외치듯이 말이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본질이예요.

나의 신앙이 본질은 어느덧 사라지고 주변 것만 남은 신앙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소예언서, 특히 요나서를 통해 우리는 본질에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계세요?

하나님입니까? 목사입니까? 십자가의 삶입니까? 십자가상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따르세요?

교파의 교리입니까? 성경말씀입니까?


10.

이제 요나서의 본문으로 가보시죠.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욘1:1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은 요나를 아밋대의 아들로 소개를 하죠.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밋대라는 이름은 ‘진리’, ‘신실’이라는 의미의 [에메트]에서 유래된 것이죠.

그러니까 요나에게는 신실함이 있다는 의미겠죠.

이와 마찬가지로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입니다.

비둘기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노아의 시절,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도 그 물은 150일 동안 온 천지를 덮었습니다.

이후, 노아는 방주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보내신 비둘기인 셈이죠.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요나는 전혀 신실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전혀 순종적이지 않습니다.


11.

욘1: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2절은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새번역에는 충실하게 번역되어 있지 않은데요.

히브리어는 문장에서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2절에도 동사가 먼저 나오는데요.

충실히 직역으로 하면, “일어나서 가라 저 큰 성 니느웨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3절도 동사가 먼저 나와요.

이것도 충실히 직역하면, “일어났다. 요나는, 다시스로 향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입니다.

위의 2절은 하나님의 말이고, 3절은 요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요나는 일어나 다시스로 간 거죠.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의 한 지역입니다.

지도를 보세요.

요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똑같은데 내용, 즉 본질이 다른 것이죠.


12.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불순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죠.

요나가 불순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앗시리아가 누구입니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취를 사라지게한 장본인들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하신 겁니다.

요나는 무서워서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죠.

요나는 풍랑이 일자 자신의 잘못이라고 바다에 뛰어든 인물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불순종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까봐 그것이 싫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살려 주실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죠.

그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겁니다.


13.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 역사상 여로보암은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앗시리아는 일시적인 쇠퇴의 기로에 놓여있었죠.

그들은 자중지란에, 타락이 극에 달하면서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앗시리아로부터 북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만약 앗시리아가 먼저 멸망했더라면 북이스라엘은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니느웨가 회복하면 오히려 북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거죠.

이 역설적인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나의 불순종을 여러분은 힐난할 수 있을까요?


14.

그런데 저는 여기서 요나가 왜 불순종했는지를 따지고 싶진 않습니다.

저의 관심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셨을까요?

성경은 명확하게 니느웨의 악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듯이 악의 향기가 하늘로 올라오면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 땅의 악행이 하늘을 찌를 때 노아를 보내셨고,

이집트의 악행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칠 때 모세를 보내셨으며,

죄악의 최정점에 다다랐을 때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저는 요나를 기독교인들로 대변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땅이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필요한 이유는 곧 이 땅에 해결할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15.

3일전 11월 3일, 인천에 사는 가족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가족은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12살 된 초등학생 딸이었어요.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생활고 때문이었습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2년 만에 같은 사건인 셈입니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12살짜리 딸의 유서였습니다.

“그동안 아빠 말을 안 들어 죄송하다. 밥 잘 챙겨 드시고 건강 유의해라. 나는 엄마하고 있는 게 더 좋다.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것이기에 슬프지 않다”

아마도 엄마와 딸은 아버지에게 생활고를 덜어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둘의 모습은 본 아버지도 따라서 목숨을 끊은 것이죠.


16.

이 땅의 악이란 불의와 부정, 타락 등뿐만 아니라 구조적 모순과 가난, 상대적인 박탈감과 불균형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2년 전에도 그렇지만 이 사건을 접하고 두려웠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우리교회가 이 지역의 악을 도말하기 위해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이죠.

더욱이 최근 지역의 가정들을 돌아보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게 된 터라 더욱 두려웠습니다.


17.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요나의 민족만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나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하는 분도 아니라는 뜻이죠.

그리스도인은 악한 땅 니느웨에 보내진 요나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 본질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18.

세상에도 나눔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잘 나누고 베푸는 이들이 있어요.

그러나 이 나눔과 그리스도인의 나눔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나눔은 자신을 먼저 채우고 그리고 남은 것을 베풉니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원리는 이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자신을 버려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나눔이죠.

그러나 대신 하나님께서 나를 채우는 원리가 기독교적 나눔의 원리입니다.

이미 수요영성예배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죠.


19.

말씀을 들어도 공허하고, 예배를 드려도 허전한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먼저 채워야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 논리는 성경적 논리가 아닙니다.

말씀은 채워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물처럼 담겨져서 퍼주는 것이 아니라 샘처럼 퍼주어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성경의 원리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에게 보내진 분들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보내져서 그를 살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에게 전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정체성이고, 그것이 성장의 비결입니다.

보내진 곳에서 얻고, 채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보내진 사람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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