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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마가복음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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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묵상12]제자가 되는 것은 나의 선택권이 아닙니다.(마가복음 3: 13-19) 제자가 되는 것은 나의 선택권이 아닙니다. 주께서 '세우시고', '지명하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시고',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에 순종하는가 아닌가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제자의 조건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 분의 주권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오직 주께서 나를 향해 '일하심'을 인정하고, 나에게 '하게 하시도록' 허락하는 순종뿐입니다. 순종이 귀신을 내어쫓는 힘으로 자랍니다. 순종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묵상11]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판단의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마가복음3:1~12) 정치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 똑같다고 냉소를 보냅니다. 설마 그들이 다 똑같을라구요. 그들에게도 어릴적 꿈이 있었을 것이고 정의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성 틀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성 체제의 견고함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 개개인의 욕심이 기성체제를 만드는 것 뿐입니다. 욕심은 왜곡을 낳고 왜곡은 괴물을 낳습니다. 복음의 가장 큰 적은 반(anti) 복음이 아니라 반(half) 복음입니다. 가다가 멈추면 아니간만 못하듯 반쯤 복음은 진리를 왜곡합니다. 왜곡된 복음은 하나님의 마음보다 체제의 기준을 정하는데 혈안이 됩니다.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보다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목숨을 겁니다. 우리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이 옳습니다. 사랑이 왜곡되면 미움이..
마가복음묵상10] 십일조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마가복음 2:23-28)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첫날을 안식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정신은 창조의 영광을 음미하고 즐기며, 거룩한 축복을 누리게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안식을 6일간의 노동력에 대한 보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안식을 마치 노동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는 6일에 의한 1일이 아니라 1일에 의한 6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6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안식의 기쁨으로 6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십일조개념은 나머지 9/10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9/10를 자기 소유로 하기 위해 1/10을 드립니다. 1/10을 드렸기에 9/10은 자신의 것이라고 더욱 당당해 합니다. 그러기에 1/10을 더욱 강하게 주장..
마가복음09] 변화란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입니다.(마가복음 2:18-22)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유명한 책 [제자입니까]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합니다. 마음의 집에 쾌락이라는 샹드리에를 헌신이라는 전구로 바꿉니다. 욕심이라는 벽지를 떼어내고 자비라는 벽지를 바릅니다. 이기심이라는 마루를 걷어내고 봉사라는 장판을 깝니다.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것 같은지를 질문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결코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집의 구조는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리모델링이 아니라 새롭게 건축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변화를 리모델링쯤으로 생각합니다. 나의 나쁜 감정을 억제하고, 좋은 감정으로, 나의 악한 습관을 내려놓고, 선한 습관으로 바꾸는..
마가복음08] 모르는 것이 창피한 일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감추는 것이 창피한 일입니다.(마가복음 2:13-17) 제가 어릴 적 다니던 시골 교회에서는 선후배들 간의 관계가 참 돈독했습니다. 위계질서라는 것이 예전에는 강해서 더욱 그런 면도 있겠지만 후배들은 선배들을 잘 따랐고, 선배들도 후배들을 참 잘 챙겨줬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선배들은 후배들의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들을 일과처럼 했었는데 저도 그 수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목사 아들이라는 특수한 위치도 그렇지만 왠지 잘 모르면 창피할 것 같은 생각에 처음에는 선배들이 가르쳐 준다는 말이 제겐 큰 부담감이었습니다. 이리빼고 저리빼고 하던 제게 어느 날 한 선배형님이 제게 빵을 사준다더군요.(그 당시에는 만남의 장소로 빵집이 유일했습니다.) 맛난 빵을 거의 다 먹을 무렵 그 형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
마가복음07] 세상과 똑같은 반응으로는 새로운 길을 갈수가 없습니다.(막 2: 1-12) 가장 다루기 쉬운 사람은 반응에 대한 예측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흐름은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반응을 하도록 하여 일반화를 시킵니다. 그리고 일반화의 논리가 통하도록 여론과 환경을 조성해 버립니다. 일반화의 전형은 '유행'인데 유행이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유행을 거스린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화를 강요하는 사회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사회적 일반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자 개인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객체로 창조되었음에도 말이죠. 사회적 벽은, 견고하고 거대하기 때문에 넘기 힘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일반화의 틀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겁나고 무섭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무섭다는 일반화를 이긴 다윗만이 골리앗을 넘을 수가 있..
마가복음06] 성공하는 방법은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막1:40-45) "선생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대화의 내용은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그 속의 의미는 심오합니다. 나병환자는 ‘선생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궁금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병이 낫는 것’이 중요했을까요? 이 나병환자의 말이 심오한 것은 그의 고백이, “나의 모든 운명은 주님 손에 달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은총이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이것이 믿음 아닐까요?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구하기 전에 우리의 요구를 강요합니다. 그 분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은 그 분의 손에, 그 분의 주권에 맡긴다는 것이죠. 나를 살리시던, 죽이시던 그 분 앞에 항복한 내가 있어야 은총을 구할 수 ..
마가복음05]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막1:29-39) "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병고침의 이적은 악한 영들을 몰아내시는 것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과 육의 조화로운 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34절에서 주님은 귀신들에게 입을 닫을 것을 명하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면 그들의 사역을 멈추지 않을까요? 혹여 귀신들이 전도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요?^^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몇 가지 유추가 가능한데, 하나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아니기에 그들의 입을 막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