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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열왕기상묵상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것은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열왕기상 12:20-33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것은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하나의 이스라엘은
솔로몬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제 분단된 이스라엘을 만나게 되는데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습니다.

분단된 조국을 가진 우리에게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살아야 하는 아픔은 익숙합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분단체제는
사실 우리 민족에게는 큰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가족끼리 서로 싸우는 가정이
남과도 온전한 사귐을 가질 수 없듯이
우리 민족의 얽히고설킨 감정들은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려 싸우고, 동서로 갈려 싸우는 처지는
분단이 주는 아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굳이 이스라엘이 왜 두 조각으로 나누게 되었는지
설명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우리가 다 읽은 바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남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시절 총애를 받으며 큰일을 했던
여로보암이 각각 왕이 되었습니다.

이 두 왕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만큼
어려운 처지에서 출발했습니다.
르호보암은 이미 무너지고 깨진 나라의 처지에서 왕이 되었고,
여로보암은 쿠데타나 진배없는 방법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반쪽을 쿠데타로 점령한 여로보암보다
왕의 아들로 왕위를 승계한 르호보암이
더 정통성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여건상으로 보면 여로보암이 훨씬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면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왕이 되었고,
그분의 뜻에 따라 그 왕위는 지켜질 것입니다.
다만 솔로몬 때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조건이 있었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잘 지켰을 때입니다.

어쩌면 이보다 좋은 여건도 없겠죠.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 여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씀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겜을 건축하고 브느엘도 건축했습니다.
이 건축은 단순한 도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요새화 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요충지를 만든 것이죠.
그는 솔로몬의 수하답게 솔로몬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과 병거를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는 솔로몬의 방법 말입니다.

문제는 여로보암이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두려운 것이 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는 것이었는데요.
당시 하나님의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예루살렘은 르호보암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예루살렘을 출입하게 되면
자연스레 자신보다 르호보암을 더 추종하고
왕으로 섬길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짓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고 회유한 것이죠.

이단이 왜 이단인줄 아십니까?
말씀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말씀의 일부분만 발췌해서 하나님을
규정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로인해 더 깊이 하나님께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죠.

이단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도 이와 같은 일들은 수시로 벌어집니다.
지난주일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우리 머릿속에 이런 속삭임이 늘 존재하죠.
“굳이 멀리 교회까지 갈 필요가 있겠어? 집에서 예배하면 되지.”
“굳이 멀리 선교할 필요가 있을까? 가까운 이들을 선교하면 되지.”
“굳이 시간 내서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삶이 기도이지.”

위의 말은 다 맞는 말입니다.
특별히 교회나 집이나 예배의 장소가 구별될 필요는 없죠.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하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니까요.
또 선교에 멀고 가까운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삶이 기도 맞죠.
그런데 실제로 집에서 예배가 되십니까?
가깝고 쉬운 방법의 선교는 하고 계십니까?
정말 삶이 기도 맞습니까?
혹시 이런 속삭임은 더 깊이, 더 가까이 가려는 우리의 신앙을
좌절시키지는 않습니까?

금송아지의 부당성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혹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과 세상인의 경계선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기까지, 지금도 괜찮아...' 하면서
자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멀건 가깝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가야죠.
어렵건 쉽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 있으면 해야죠.
시간이 많이 들건 적게 들건 기도해야 할 것은 해야죠.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생각은
우리의 판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명령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이죠.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니까요.
그렇다면 그분이 마음을 주시면 해야 합니다.
그분이 뜻을 품으시면 따라야 하죠.
우리의 안위나 우리의 걱정,
그리고 편안함을 지키기 위해서 그 행동을 멈춘다면
우리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왕 가려면 예루살렘까지 가세요.
금송아지를 만들지 마세요.
이왕 하려면 리스크를 짊어지고도 하세요.
두려움에 “여기까지만...”하지 마세요.
여로보암은 그렇게 세운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33절에서 ‘자기 마음대로’라고 적고 있어요.

자기 마음대로 정한 약속에서 주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정한 예배에도 주님의 임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것은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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