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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로마서묵상

로마서묵상34] 삶은 연습의 연속이다.(롬12:9~21)

거듭난 삶은 연습의 연속이다.(롬12:9~21)

 

 

 

 

 

초신자들에게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이 질문은 아마도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으셔서 인간에게 죄 지을 불씨를 만드셨느냐는 질문과 다름없을 것이다. 수많은 종교학자들, 종교적 천재들은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딱히 그 비밀을 여는 해답을 줄만한 답변은 아직 없다. 학자 아니라 학자 비슷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나 역시 이 질문에는 늘 꿀 먹은 벙어리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로 만드셨다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는 선악을 구별할 능력이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다. 아니 선악을 분별해서도 안 된다. 선악의 기준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기준과 판단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사건 이후로 우리는 마치 우리 안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왔다. 우리가 판단과 심판의 기준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선악을 구별하고 판단하는데서 온다. 들쭉날쭉하고, 온전한 기준이 없는 우리가 심판자가 될 때에 우리는 가장 강력한 사단의 노예가 된다. 바울은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인과 죄인도, 원수와 친구도 가를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가 기준이 되어 버렸다. 내가 원수를 만들고, 친구를 만든다. 내가 죄인을 만들고 의인도 만든다. 우리는 때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유는 우리가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2:20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제 내가 내 안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는 것은 이제 주님이 내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이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내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의 기준이시고, 심판의 기초이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래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시면 하는 것이다.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옳은 것이다. 그것이 거듭남의 증거이다.

 

 

거듭남은 스스로 자라나지 않는다. 거듭남은 삶이다. 삶은 시간이고 연습이다. 아무리 좋은 운동법을 알아도 연습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공부법을 알아도 그것을 연습하지 않으면 습관이 될 수가 없다. 삶은 연습이다. 거듭남의 삶 역시 연습이 필요하다. 아직도 내 속 어딘가에서 속삭이고 있는 옛사람의 속삭임을, 거듭난 삶을 연습함으로 물리쳐야 한다. 나는 거듭난 존재이기에 더 이상 옛사람이 나를 속박할 수 없음을 선언해야하고, 오늘도 나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선포해야 한다. 여전히 미움의 감정이 내 안에서 장막을 치려 할 때 우리는 사랑을 연습해야 하고, 다정함을 연습해야 한다. 여전히 내 주위에는 비난과 비판의 올무가 맴돌기에 존경함의 연습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열심을 내야하고, 소망을 품어야 하며, 부지런의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연습이 필요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함으로 거듭난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 연습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쌓아가야 한다. 삶은 연습함의 축적이다. 영적인 연습이 우리의 영의 기초를 세운다. 악에 지는 것은 영적인 연습함을 멈추는 것이다. 선으로 이기는 것은 영적 연습을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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