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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인물에서배우는영적원리

성경인물묵상 01] 가인- "내가 예배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실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다."(창세기4:3~9)

성경인물에서 배우는 영적원리 01] 가인

 

 

 

 

 "내가 예배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실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다."

 

 

가인은 성경상 대표적인 유명인물이다. 아쉽게도 그 유명세는 결코 좋은 의미의 유명세가 아니다.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고, 그것도 혈연지간을 살해한 비정한 형이었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가인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성품과 가족 관계 속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등을 사건의 수사관 같은 시각으로 꼼꼼히 가인 주변의 상황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살인의 동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그의 성품을 형성하게 된 모든 것들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정서적 문제 및 내적 상처에 이르기까지 가인의 모든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면밀한 수사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커다란 벽에 붙이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겐 가인의 상황과 내면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너무도 적다. 오직 유일한 단서는 성경밖에 없다.

 

가인은 즉흥적으로 혹은 장난삼아 살인을 저지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살인에 분명히 이유가 있다.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고, 이전부터 형제간의, 혹은 가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가인이라는 이름은 “얻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을 잃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은 그들이 얻은 첫 열매였다. 언제나 큰 아들이 부모에게는 소중하고 귀중하듯이 가인 또한 그런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이는 동생 아벨의 이름에서도 드러나는데 얻었다는 의미가 있는 가인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아벨은 별 의미가 없는 이름이다. 굳이 뜻을 찾자면 ‘무익’, ‘허무’라는 뜻일 뿐이다. 이렇게 비교하자면 가인이 그 부모에게는 얼마나 귀한 존재였겠는가?

 

많은 이들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질투의 관점에서 본다. 풀어 말하면 어쩌면 오랜 시간동안 가인보다 아벨이 더 사랑받았고, 가인보다 아벨이 더 소중이 여김을 받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마치 폐인이나 된 모양 생각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인은 결코 질투의 화신이 아니다. 오히려 질투를 받으면 받았지 질투할 만한 위치도, 상황도 그에게 있지 않았다. 그는 아벨보다 더 사랑받았고, 아벨보다 더 존귀함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그가 장자였다. 그런데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가? 왜 가인은 아벨을 질투하게 되었는가? 그 질투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칭찬의 긍정적인 측면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칭찬이 진정한 칭찬이 되기 위해서는 칭찬하는 자의 정직하고 온전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조건 오냐오냐하고 무조건 허용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위해 하는 칭찬은 칭찬이 아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은 그 별명에 무색하게도 이방 여인들 앞에서는 그의 지혜가 꼬리를 내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실패의 첫 단추인 이방여인에 현혹되는 도구는 다름아닌 칭찬이었다. 솔로몬에게 온 시바여왕은 솔로몬에게 온갖 칭찬을 다 늘어놓았다. 그 칭찬이 솔로몬의 지혜를 가려버렸다. 칭찬에 취한 솔로몬은 마치 혼이 나가버린 것처럼 시바여왕에게 줄 것 안 줄 것을 다 내어줘 버렸다. 지나친 칭찬은 사람을 오히려 죽인다. 지나친 칭찬은 그 사람이 스스로 잘하고 있는 줄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박수 받으면 자신이 잘하는 줄 안다. 그 박수가 오늘날 사탄의 유혹의 도구가 된 지는 꽤 오랜 일이다.

 

가인은 그의 부모에게 둘도 없는 보배였다. 그리고 가인은 그렇게 취급받았다. 가인은 자신이 하는 일은 뭐든지 허락받았다. 오늘날 많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허용받는다. 바쁜 부모들은 자식을 양육한 시간조차 없다. 자식이 요구하는 것은 거의 들어 준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이 부모는 당연히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존재로 여긴다.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그렇게 키웠다. 가인도 뭐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사랑받는 것인줄 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사랑받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내가 하는 것은 뭐든 허용되고 용납되는 것이 사랑받는 것인 줄 착각한다. 그 착각 안에는 책망이란 없으며, 징계란 더더욱 없다. 내가 하면 무조건 받아 줘야 하는 허용만 있을 뿐이다. 가인에게는 그 허용이 바로 사랑인 줄 알며 살았다. 자신이 하면 모든 것이 옳은 줄 알며 살았다. 그것이 교만인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살인의 동기가 된 상황을 보면 찜찜함을 금할 수가 없다. 가인이 동생을 살인한 동기가 먹을 것을 탐하여 생긴 탐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산 분쟁이나, 이념 혹은 사상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놀랍게도 그가 행한 살인의 직접적 동기가 되는 것은 예배였다. 하필 예배가 왜 살인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가? 살인의 동기가 악한 마음이나 행동이 아닌 예배라는 점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제아무리 예배라 하여도 동기가 불순하면 악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제아무리 신앙적인 활동이나 행위라 할지라도 내면의 문제가 발생하면 악한 영향력을 품어낸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인의 불순하고 악한 내면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예배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하는가? 내가 회개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용서하셔야 하는가? 내가 종교적 행실과 금식을 한다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를 받아 주셔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받아주시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받아 주신다.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면 당연히 받아 들여졌던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왔다.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그의 얼굴빛이 변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예배인데 왜 안 받으시는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왜 거절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예배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배라 할지라도 자신의 요구가 들어져야 기분 좋고, 자신이 만족해야 되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예배는 그분 앞에 나의 모든 것이 엎드리는 것이다. 기도자들 가운데도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음을 기분 나빠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마음으로 나오든 예배를 한다면 모든 것을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듣고도 말이다. 

 

회사에서 당신의 보고서를 당신의 상사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가? 당신의 상사는 당신의 보고서를 보면서 “보고서를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칭찬하면서 당연히 받아 주어야 하는가? 그것이 당신에겐 당연한가? 당신이 쓴 것이기 때문에? 상사는 철저히 회사 혹은 자신의 업무적 관점에서 당신의 보고서를 볼 것이다. 당신이 썼기 때문이 아니라 보고서의 내용을 가지고 판단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이 ‘쓴’ 보고서가 아니라 회사에 ‘맞는’ 보고서를 써야 한다. 만약 당신의 보고서가 퇴짜를 맞았다고 기분이 상한다면 당신은 지금 교만한 것이다. 회사는 당신 위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드렸기 때문에' 예배가 아니라 '그분이 받으셨기 때문에' 예배이다. 당신의 예배를 안 받으실 수도 있다. 때론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늘 비교당하고, 차별받으며, 멸시함 받는 자들이 질투를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질투할 만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 질투로 인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늘 많이 갖고, 늘 좋은 자리에 있었으며 누가 봐도 질투하기 보다는 질투를 받음직한 이들에게 단 한번, 단 한번의 겸손을 요구받는 그 때 질투가 폭발한다. 결코 질투함직한 이들이 아니다. 늘 질투받을 만한 자리에 있던 자들이 한번의 질투에 폭발하고 마는 것이다. 겸손을 요구받는 그 때, 겸손의 자리에 가지 않으면 교만이 가득차고, 교만은 결국 질투를 폭발시키고 만다. 결국 살인은 교만 때문이다.

 

아벨의 이름, “나는 무익합니다.”는 세상에서는 초라해 보이나 주님 앞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예배는 겸손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내가 겸손해야 비로소 말씀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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