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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사도행전묵상일기_03 내가 서 있는 마지막 자리가 나의 인생이 됩니다.

사도행전 1:15~26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베드로가 그 신도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직무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불의한 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습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자기들의 말로 아겔다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피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의 거처가 폐허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서,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다.


가룟 유다에 대한 논란은 그가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 이외에 딱히 기록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카톨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는 가룟유다를 성인으로 추서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았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가룟유다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그럴듯해 보이죠?

그러나 이런 운명론적 추론을 저는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뭐 신학적 논리의 문제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문제를 따지기에는 저의 지식은 지극히 미약합니다. 다만 그런 논리의 추론에서 만약 "나에게 가룟유다와 같은 사역이 맡겨진다면?"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나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만 그래도 저는 그런 괴로운 사역을 맡고싶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도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선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응답에 따라 베드로가 될 수도 있고, 가룟유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면밀하게 보면 가룟유다의 행동과 생각을 바로 우리 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엔 티비에서 디즈니 만화를 많이 보여줬습니다. 그 중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도날드 덕의 인생극장(?)입니다. 도날드 덕이 어떤 결정을 해야할 때 꼭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나는 형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얀 옷을 입은 도날드고 또 다른 하는 검정 옷에 삼지창을 든 도날드였습니다. 착한 생각과 나쁜 생각이 우리 안에는 늘 공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없이 갈팡질팡 왔다갔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과정 가운데 갈팡질팡할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실수하고 헤메이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둘이 공존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말썽이 많았던 사람은 가룟유다가 아니고 베드로였습니다. 가장 큰 칭찬을 받았던 사람도, 가장 큰 질책을 받았던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한마디로 갈팡질팡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좋았다가 믿음이 땅바닥에 고꾸러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하기도 했다가 가장 크게 곡해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큰소리쳤다가 또 그 앞에서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지조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마지막에는 주님의 제자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도 그가 선 마지막 자리는 제자의 자리였습니다.가룟유다가 기록이 별로 없었던 것을 보면 그리 큰 말썽이 없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재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복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요12:6) 계속되는 자신의 잘못에 회개를 한 기록이 없습니다. 큰 잘못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회개도 없는 것입니다. 유추지만 저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기회를 가졌다면 성경을 그 사건을 크게 다루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장에서 그에게 마지막 권고를 하십니다. 가룟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우리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잘못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게 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는 종이 한 장입니다. 둘 다 뛰어난 제자였고, 예수님의 기대가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둘 다 선택된 사람들이었고, 주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맡길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둘 다 부족한 인간이었고,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부족함과 실수 가운데서도 한 사람은 마지막이 제자의 자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부르심을 저버리고 떠난 자리였습니다.실수, 인격,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족함, 연약함, 미련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르심의 자리에 지금 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나의 자리가 제자의 자리이길 간절히 기도하며, 힘들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가 결론인 사람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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