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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내 안의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


예레미야4:1~4,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네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나 주를 찬양할 것이고, 나도 그들에게 복을 베풀 것이다.”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묵은 땅을 갈아엎고서 씨를 뿌려라.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너희는 나 주가 원하는 할례를 받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서 너희를 태울 것이니, 아무도 끌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나는 2가지 묵상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는 묵은 땅은 단순히 폐허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묵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니르ryn다. 그런데 '갈아엎으라'는 단어도 히브리어로 니르ryn다. 같은 단어다. 그러니까 [묵은 땅]이란 당연히 갈아엎어야 할 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하나님에게는 묵은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갈아엎어야할 땅이니까. 명령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왜 그렇게 말하시는가? 우리 심령의 묵은 땅이란 그저 쓸모없는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묵은 땅을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이라 쉽게 생각한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땅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심령의 묵은 땅은 쓸모없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쓸모있는 땅이 된다. 누구에게 그런가?  바로 사탄에게 그러하다. 우리는 땅에서 왔다. 우리의 심령도 땅과 마찬가지로 굳는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다.
겔11:19~20,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새로운 영이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는 굳어 버린다. 땅이 시간이 흐르면 단단하게 굳어지듯이 우리의 심령도 굳어지고 돌같이 되어 버린다. 억지로 하는 심령, 타성과 습관이 젖어버린 심령, 이름 때문에, 체면 때문에, 직분 때문에 사역하면 심령은 반드시 굳는다. 타성에 젖는다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오랜동안 변화나 새로움을 꾀하지않아 굳어진 습성을 뜻한다. 우리가 매일 예배하는 이유, 기도하는 이유가 있다. 내 굳은 마음을 기경하는 것, 갈아엎어야하기 때문이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굳은 마음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매일 예배하며 매일 자신을 기경하는 사람은 눈에 끄게 띄지 않는다. 늘 자신을 기경해 왔기에 갑자기 굳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잘 나갈 때 잠수 탄다.  그리고는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찾아온다. 아무리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굳어질 만큼 굳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아프게 가슴을 파야하고, 강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걸 또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너무 힘들다. 자신을 굳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자신이 굳어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불만이 쌓인다. 자신이 굳어지면 모든 것이 남의 탓이 되고, 자신이 굳어지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 이르게 하지 말라. 진지하게 돌아 보아야 한다. 정말 당신은 하나님 음성 앞에 부드러운 마음을 품고 있는가? 당신의 심령은 굳어져 있지는 않은가?
바울은 에베소교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베소서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마음이 굳어짐과 하나님을 떠남은 동시에 일어난다. 내 마음이 굳어지면 지혜도 없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굳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한다. 호세아10:12을 보라.
호10:12,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
땅을 갈아엎어야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나의 땅을 경작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도, 정의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기 전에 우리 안의 묵을 것을 개간해야 한다.
두 번째 묵상은 이것이다. 묵은 땅은 사랑과 은혜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은혜가 은혜가 아니게 만드는 가시덤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가시덤불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교하셨다. 그 비유에는 4가지 땅의 종류가 나온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길가와 돌과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다. 예수님은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진 씨앗이 자라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4: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다른 것과는 달리 가시덤불이 자라 씨앗을 방해하는 장면이다. 예레미야가 외치는 외침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에게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이유를 마가복음 7장에 빗대어 찾는다면 분명 가시덤불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과연 이들에게 무슨 가시덤불이 있길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일까?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또한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안의 가시덤불은 무엇일까?
지난 주, 다윗에 대한 묵상을 하다가 하나님이 생각나게 한 구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의 비유다.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내용은 간단하다. 일만달란트 빚진 B씨가 채권자 A씨에게 불려갔다. 빚을 갚을 길이 없는 B씨는 사정을 했고, 이를 불쌍하게 여긴 A씨는 통 크게 모든 빚을 없던 일로 했다. 이렇게 일을 정리하고 돌아가던 B씨는 길에서 마침 C씨를 만났다. C씨는 B씨에게 백데나리온을 빚지고 있었다. B씨는 C씨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C씨가 빚을 갚을 길이 없다고 하자 B씨는 C씨를 고소해 버렸다. 이런 일로 C씨가 감옥에 갔다는 소식을 A씨가 듣게 되었다. A씨는 화가나 B씨를 불러다 호통 치고 빚을 도로 갚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이해가 가는가? 여기에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먼저 B씨의 태도다. B씨는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았다. 일만달란트를 현재 화폐로 계산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비교를 하자면 당시 일당은 1데나리온이었으니 100데나리온이라면 100일치 일당인 셈이 된다. 그런데 달란트는 화폐 단위 자체 차원이 다르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의 값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일당으로 계산하면 약 16년간의 수당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일만달란트는 약16만년의 수당이라는 말이다. 상상이 가지 않는 액수다.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받았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러나 B씨는 C씨를 만났을 때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왜냐?
당신이 만약 오늘 당신의 빚 1억쯤을 누군가 안 갚아도 된다고 했다 치자. 너무 감사한 나머지 너무 기쁜 나머지 기분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불쌍한 빚쟁이를 만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 여러분이라면 이랬을 것이다.
“와~ 기분이다... 나 오늘 기분좋거든? 기분이다... 내가 쏠게...”
그러나 B씨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더 내고 예전엔 안하던 감옥에 보내는 짓까지 했다. 왜 화가 났을까?  왜 그랬을까? 자! 생각을 해보라. 당신이 오늘 약 천만원쯤, 1억쯤 빚을 졌다 치자. 열심히 벌어서 갚을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일만달란트쯤 된다 치자. 굳이 현재 화폐 단위로 환산할 때, 일당을 5만원으로 계산할 때, 약 3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당신이 매년 1억을 모아도 3만년이 걸리고, 10억씩 모아도 3천년이 걸린다. 그렇다면 갚을 마음이 있겠는가? B씨는 처음부터 갚을 마음이 없었다. 아니 갚을 방법도 없다. 이런 상황이 되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일지라도 미안한 마음이 없어진다. 자신이 할 방법이 없는 액수라면 사회적인 모순이나 그것을 받으려는 주체에 대한 분노만 커진다. B씨에게 감사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탕감받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탕감해 준 사람이 생색내는 것처럼 생각했으리라.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모른다. 아이에게 백지수표와 또봇장난감을 내놓는다면 그 아이는 무엇을 더 좋아할 것 같은가? 그것이 우리의 감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큰지 정말 알지 못한다. 알 수 있는 감각이 없다. 그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지 결코 알지 못한다. 정말 안다면 지금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용서가 안 되는 줄 아는가? 미안하지만 당신은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왜 구원 받으라고 하는지, 왜 나더러 하나님의 자녀되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왜 나더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지, 왜 용서하라고 하는지, 희생하라고 하는지,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화가 나고 참을 수 없는 불평이 나온다. 십자가를 주셨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하다. 왜 우리는 돈에 집착을 하는 줄 아는가? 돈은 손에 잡히는 것이고, 내 생각에 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생각에 안 잡혀도 물질은 잡힌다. 예수님의 말씀은 손에 안 잡혀도 축복은 손에 잡히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백지수표같은 하나님보다 또봇장남감 같은 재물에 우리는 더 혈안이 된다. 그 백지수표로 또봇장남감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인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B씨가 자신이 얼마나 큰 것을 탕감받았는지 모르듯이 우리도 얼마나 귀한 십자가를 받았는지 모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상식 안에 계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안에 갇힐 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내가 생각하는 데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때로는 하나님이 나의 장난감이다. 당신이 정말 갈아 엎어야 할 묵은 땅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 생각 안에 머무는 하나님이다. 내 상식으로 이해하려는 하나님이다. 본래 하나님은 내 상식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다. 내 상식에 맞고, 내 뜻에 맞고, 내 생각에 맞는 당신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왜 자꾸 상식만 들먹이는가? 왜 내 생각, 내 뜻만 관철시키려고 애를 쓰는가? 당신이 생각이 진짜 옳은가? 당신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정말 아는가? 정말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는가? 그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가?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큰지 알아야 한다. 사력을 다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정말 귀하고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의 묵은 땅은 그 사랑을 알려고 하지않고 그저 신앙생활만 하려는 것이다. 그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얼마나 값진 것을 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그것을 알기위해 떠나는 모험의 길이다. 당신이 만족을 얻으려고 찾는 보물찾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을 위한 신앙이라는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이제 하나님을 알 때가 되었다. 이제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고자 할 때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귀한 것을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엄청난 탕감을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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