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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내 안의 거짓 신앙의 뿌리를 뽑으라



예레미야6:13~15,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러져서 시체더미를 이룰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이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이 글은 예레미야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상고하기 위한 묵상이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한다고 하니까 주위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우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예레미야는 우리의 아픈 구석을 후벼파는 재주가 있다. 골수를 쪼개듯 우리의 거짓과 위선, 불신앙과 미신에 휩싸이는 우리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대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말씀 앞에 오늘 서야하는 이유는 현재 한국 땅의 교회가 예레미야시대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저항시인인 박노해는 이런 말로 시를 적었다.
“희망은 정직한 절망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회개에서부터 시작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직면하는 데서부터 희망이 시작됨을 믿어야 한다. 나의 문제,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나의 고백이 없이는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필요를 알아야 요청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 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말씀을 근거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렘1:10,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여기에 6가지 단어가 등장한다. ‘뽑으며Pluck up’, ‘허물며break down’, ‘멸망시키며destroy’, ‘파괴하며overthrow’, ‘세우며build’, ‘심는다plant’는 단어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소명이다. 한마디로 부수고 다시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창조적 파괴]라고 주제를 정했다. 말이 좋아 창조적 파괴지, 부수고 허는 것은 아프고 쓰린 것이다.
결혼을 하면 갈등과 문제들이 생긴다. 나의 울타리와 너의 울타리가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30년 가까이 쌓아온 울타리를 부수고 새로운 가정의 울타리를 세우지 않으면 그 가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픔이 크고 작을 뿐이지 이 과정은 동일하다. 부수어야 하고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20을 잘 안다.
갈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내 울타리를 헐었다는 의미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고 새롭게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패턴을 허물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패턴을 갖는다. 나의 스타일을 허물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스타일을 취한다. 나의 경험을 허물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
예레미야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전의 사람으로 남유다의 선지자다. 요시야왕 13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40년동안 지속했다.  그는 개혁적인 설교가였다. 주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 그의 설교의 초점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사역기간 내내 인기 없는 설교가였다. 본래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기와는 인연이 없기 마련이다. 오늘날 혁신이나 개혁이라는 말이 마치 성공하는 사람들의 화두처럼 쓰이고 있지만 사실 혁신이란 자신의 뼈를 깎는 아픔과 익숙했던 삶의 패턴들을 갈아엎는 각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와는 상관없을 때 일지도 모른다. 예레미야 시절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오히려 듣기 싫어 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도 나름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시대 남유다는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앗시리아의 몰락과 바벨론의 발흥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에 놓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끼인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격동의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추종과 굴욕으로 살아남기 위한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 후에는 바벨론의 속국으로 살아가기 위한 변화가 있었다. 이런 수많은 변화와 노력에 지친 이들에게 영적 개혁이라는 예레미야의 설교가 영양가 있게 들리기란 사뭇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전통과 경험에 의존한 신앙생활에 반기를 들었던 예레미야는 더욱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안에도 전통와 경험, 전례에 대한 신앙생활이 존재한다. 때론 샤머니즘shamanism, 혹은 전통종교의 형태와 혼합되어 기독교로 착각되는 것도 부지기수다. 어느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할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가장 말씀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강한 저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에게는 강한 선민사상選民思想이 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민족이라는 것과 그가 함께하신다는 자부심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들이 붙잡고 사는 것은 “다윗의 언약”과 “성전”이었다. 다윗의 언약이란 한마디로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원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가졌다는 것이 민족적 자긍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약속과 성전이 부적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을 예레미야가 깨뜨려야 한다고 하니 어떻겠는가? 마치 이것은 내가 믿고 있던 모든 신앙을 흔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돌도 많이 맞고, 욕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곳에서 쫓겨나는 수모도 수시로 당했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그런 소명을 주셨을까?
지난 주, 갑작스레 맹장이 터져 위험한 상황에 몰렸던 한 권사님의 긴급 수술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고비를 넘기고 안정을 취한 그 권사님을 만났다. 이 권사님은 우리교회의 지역선교사역 중 하나인 다림교육의 또래멘토링 사역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시기로 유명한 분이다. 게다가 중보기도 대원으로 많은 환우들과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나를 만나자마자 한 이야기는 자못 충격이었다. 핼쑥한 모습으로 나를 대한 그는 내 손을 잡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수없이 환우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해 왔었는데 지금보니 제가 했던 중보기도들이 다 가짜였던 것 같아요.”
지금껏 헌신적으로 신앙생활 해오셨던 것을 아는 나는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혹시나 위험한 고비를 맞으며  충격을 받았나 싶어 염려스레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목사님, 내가 그동안 환우들에게, 고통받는 이들에게 깊이 공감하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아파보니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한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제가 그동안 그냥 타인으로 사역만 하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고도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산다고 착각하면서 살았거든요. 병상에서 진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많이 했어요."
내가 그동안 보기에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한 분의 이런 고백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내 스스로에게도 파문을 던지는 고백이였기에 더 충격이었다. 목사인 나는 진짜 목사처럼 사는지, 진짜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녔는지, 다른 사람에게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며, 이해해 주었지만 그것이 진짜 이해하고 공감하며 해 준 기도였는지, 아니면 그냥 사역으로, 일로 그렇게 했는지 깊이 돌아보게 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속에 기도가 진정한 기도인지, 모양뿐인 기도인지 잘 알지 못한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 해서 내게 중심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가까운 사람보다 먼 사람에게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니까 조금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느끼는 경우다. 사랑하니까... 봐주겠지... 가족이니까.... 용서하겠지... 이런 마음들이 존재한다. 그 말은 분명히 맞다.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가족이이어서,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기에 용서해 주고 봐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심이 멀어있거나 형식뿐이라면 그것은 틀렸다. 가인의 이야기를 글로 적은 적이 있다. 제목은 이것이다.
[내가 예배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실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예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가 진정한 예배여야 되는 것이다. 예배자가 중심이면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중심이시면 그 예배의 진정성이 중요하게 된다. 이것을 하나님은 성경 처음부터 말씀하셨다. 소위 재벌이라는 대기업에서는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상속받을 권리가 있는 아들이라고 해도, 기업을 경영하는 자인데 어찌 대충 공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다.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갑질하는 인격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께 예배한 가인Cain은 자신이 갑이었다.
“내가 예배하는데 하나님은 당연히 받으셔야지...."
"받으신다고 약속했잖아? 나 지금 예배하잖아?”
똑같은 현상이 현재 우리의 모습에도 있다.
“나 교회 나오잖아?”
“교인되었고, 영접했잖아? 권세를 주신다며? 주셔야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권세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접의 조건은 모른다. 영접이란, 자신을 부수고 하나님이 주인된 삶이라는 것은 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영접한 시간이나 장소만 기억하려고 한다. 구원받은 시간이 뭐가 중요한가? 그보다 구원받은 삶의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어느 순간 우리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잊어버린다. 사람과의 관계를 깨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바로 모양만 있는 것이다. 드라마 같은데서 보면 이중 생활하는 사람이 여자에게 선물을 할 때 아내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사는 경우를 보게된다. 선물은 똑같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다르다. 그것이 관계를 깨는 기본이다. 주위에는 남자친구가 생기거나 여자친구가 생기면 잠수타는 사람이 있다. 서로 좋아 죽는 시간들을 가질 때 친구나 멘토는 없다. 그리고 드디어 나타날 때가 있다. 그 때는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다.
하나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좋을 때, 잘 나갈 때, 정신없을 때, 바쁠 때, 거기에 하나님은 없다. 어려움이 생겨야 하나님께 온다.  문제가 생기고, 눈물나는 일이 일어나야 하나님을 찾는다. 억울하다 호소해야 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물론 하나님은 받아 주신다. 그의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서 은혜로 감싸주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될수록 중심을 잃은 예배라는 사실만 커지고,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으로 자란다. 하나님은 좋을 때도 하나님, 나쁠 때도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느 때나 하나님이셔야 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셔야 한다.
예배나 구제, 헌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이스라엘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은 예배도 없고, 하나님도 안 믿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매일 세 번 기도하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예배를 빠지지 않았다. 헌금은 또 어떤가?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거의 다 드렸다. 제사장이나 랍비인 경우, 십일조가 아니라 전부를 드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았다. 철저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면서 그렇게 했다. 유대인들이 예배생활과 신앙적 측면에서 우리보다 못하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의 예배의식과 신앙생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뇌물과 선물의 차이가 뭔 줄 아느냐? 나를 위해 주는 것은 뇌물이고, 상대방을 위해 주는 것은 선물이다. 결국 동기의 차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믿음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똑같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날 위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 있다. 똑같은 봉사나 희생이라 할지라도 날 위한 것이 있고, 남을 위한 것이 있다.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도 마찬가지다. 나의 축복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와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분명 다르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동기에 있듯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성패는 우리 중심에 있음이 자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시고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기독교를 대적하는 주류는 反기독교Anti Christian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기독교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것보다 더욱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은 우리 내부의 半기독교half-Christian다. 분명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체계다. 마치 유교적인 전통이 신앙인냥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국가주의 애국심이 신앙인냥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도덕과 윤리, 선한마음과 철학이 신앙인냥 행하는 사람이 있다. 신앙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에 있다. 아무리 선택받은 민족이라 해도 예수가 없으면 구원 못받는다. 아무리 경건성을 띄어도 그 안에 예수가 없으면 그것은 가짜다. 아무리 놀라운 성취가 있어도 예수의 말씀이 없으면 모래성이다.
우리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름난 큰 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아름다운 사회운동을 하는 교회로 한국에서 크게 존경받는 교회 중 하나다. 우연히 그 교회 목회자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교회는 이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귀한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다. 그러다보니 교인들이 다 자신이 그런 사회적 운동과 생각을 가지고 행하는 줄 안다는 것이다. 우리교회가 하니까 나도 하는 줄 안다는 것이다. 정작 그 신앙적 행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20%도 채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 자체로 마치 자신이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구원에 무임승차가 없듯이 내 중심 없는 축복은 없다. 덩달아 받는 축복도, 구원도 없다.
우리는 매일 점검해야 한다. 겨울에 난방 점검, 가스점검, 문 개폐점검하듯이 우리의 영Spirit도 매일같이 점검해야 한다. 나의 신앙은 안녕한지, 나의 통로는 구멍이 나 있지는 않은지 늘 점검하며 살아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매일 나의 신앙을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백 년이 걸리는 문제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성전을 헐라고 하셨다. 그리고 3일 만에 짓겠다고 선언하셨다. 내 안에 부순 것들은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히 새로 지어진다. 제발 날 것들은 뽑아 버리라. 거짓신앙들은 벗어버려라. 허식과 허례들을 불살라 버려라. 모든 것은 불타도 보배로운 그분만 계시면 된다.그렇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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