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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4]일그러진복음

하나님 그분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더 바라게 하는 일그러진 복음에서 떠나라

[일그러진복음2] 하나님 그분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더 바라게 하는 일그러진 복음에서 떠나라 

누가복음12:13~21,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곡은 어거스트 루드빅 스톰이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요. 

어거스트 스톰은 1862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18세에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세군 사관, 즉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37살에 그만 사고로 평생 걷지 못하는 척추장애인이 되었는데요. 

그러나 불행함 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 그의 시에 담았습니다. 

그 시가 바로 [Thanks to God]이라는 시입니다.


    Thanks to God for my Redeemer,

    Thanks for all Thou dost provide!

    Thanks for times now but a mem’ry,

    Thanks for Jesus by my side!

    Thanks for pleasant, balmy springtime,

    Thanks for dark and stormy fall!

    Thanks for tears by now forgotten,

    Thanks for peace within my soul!

    Thanks for prayers that Thou hast answered,

    Thanks for what Thou dost deny!

    Thanks for storms that I have weathered,

    Thanks for all Thou dost supply!

    Thanks for pain, and thanks for pleasure,

    Thanks for comfort in despair!

    Thanks for grace that none can measure,

    Thanks for love beyond compare!

    Thanks for roses by the wayside,

    Thanks for thorns their stems contain!

    Thanks for home and thanks for fireside,

    Thanks for hope, that sweet refrain!

    Thanks for joy and thanks for sorrow,

    Thanks for heav’nly peace with Thee!

    Thanks for hope in the tomorrow,

    Thanks through all eternity!


지금 있는 것도 주께 감사, 주님 가져가신 것도 감사. 

지나간 시간도 감사, 지금 이 시간도 감사. 

화사하고 따뜻한 봄날도 감사, 울적하고 쓸쓸한 가을날도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내 가슴의 평안도 감사.


주께서 드러내신 것도 감사, 나 다 알지 못하는 것도 감사. 

응답하신 기도도 감사, 받지 못한 것도 감사. 

영생의 비밀도 감사, 궁핍할 때 공급하심도 감사. 

측량할 수 없는 은혜도 감사, 평안의 새 가족 주신 보혈도 감사.


내 삶에 푸른 하늘도 감사, 비 뿌리는 구름 주심도 감사. 

주님 주신 광명도 감사, 마찬가지 어둠도 감사.

시험과 분투도 감사, 변치 않는 소망도 감사. 

다가오는 내일도 감사, 내일 실패 닥쳐도 소망 있어 감사.


장미 꽃 어우러진 환한 길도 감사, 장미의 가시도 감사. 

가야 할 천국 계단 남은 길도 감사, 영원히 안전한 집도 감사. 

십자가와 고통도 감사, 천국의 복락도 감사. 

불같은 시련도 감사, 모든 것 항상 감사.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모를 때 삶의 소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여러분의 그 소망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그리스도인이란 삶을 지배하는 법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법아래서 사는가? 하나님의 법아래서 사는가?"의 문제이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삶을 지배하는 법이 다르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삶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어둠의 자식은 어둠이 목표고, 빛의 자식은 빛이 목표입니다. 

조폭의 삶은 NO1이 목표고, 직장인의 삶은 사장이 목표죠. 

세상 법 아래 있으면 세상이 목표고, 하나님 법 아래 있으면 하나님이 목표입니다. 

세상의 법 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이 목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아래 있으면서 세상이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 우리의 과녁이 되는 것을 우리는 ‘죄’라 부릅니다.


신앙고백서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개혁 장로교 쪽에서 근간으로 삼는 이 고백은 1647년에 작성되었는데요. 

이 요리문답 첫 질문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으로 이 신앙고백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차이, 세상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목적의 차이입니다. 

세상인의 제일 되는 목적이 “나의 영광”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지배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쓰신다고?” 

“하나님 너무 이기적이신 것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가 아닌 나를 위해 너의 인생을 살라”고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깊은 고민에 빠진다. 나의 인생을 남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런 고민 속에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2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이다.


“우리는 남을 위해서는 살지 못한다. 오직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평범한 진리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나 이외 어느 누구도 나를 내 몸과 같이 도와주지 못한다. 이 논리는 우리 사회에 가득하기에 우리는 늘 방어기재로써의 이기주의를 신봉한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있어 우리는 남을 위해 살지 않으면 오히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고, 서로를 위해 살아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직장을 갖는 것, 우리가 일을 하는 것, 그것의 목적은 아마도 나의 안위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대부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일을 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생이 되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산자가 되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동자가 되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결국 누군가를 돕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든 물건을 누군가가 쓰고, 내가 가르치는 것으로 누군가는 성장해 간다. 내 눈에는 돈벌이일지 모르지만 좀 더 큰 눈으로는 보면 나로 인해 누군가를 세워주고 돕는 일들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산다. 


문제는 그것이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속삭이는 거짓말이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본래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 있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늘 남을 돕는 삶을 나의 이기주의의 삶으로 전락시킨다. 누가 사기꾼인가? 어떤 삶이든(나쁜 것을 제외한) 다 봉사하는 삶을 산다. 나의 직업이, 나의 삶이 누군가를 위한 삶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목적의 삶이 되어 버린다.


9.

두 번째 거짓말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내가 희생당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실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야]라는 표현은 희생이 아니다.

온유라는 뜻의 헬라어 [프라우테스]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 주로 쓰는 단어다.

야생의 기질이 충만한 말이 그 기질을 버리고 조련사를 따르는 것이 온유다.

이것이 ‘죽는다’는 것이지 희생이 아니다.


10.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을 원하시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우리의 희생으로 하나님이 영광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다.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예)안변 – 남을 도우며 사는 것 vs. 나 돈 벌려고.... - 차이는 엄청나다.

똑같이 변호사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이 있고, 그렇잖은 것 있습니다.


11.

이 같은 싸움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옛사람과 새사람에 대한 싸움은 태초에서부터 있었다.

세상과 맞서 교회와 복음이 삶의 목적에 대한 선포를 해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2.

언제나 좋은 일에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말 해야할 일들 주변에는 공격이 있고, 방해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태클걸고, 방해하는 일들이 생기면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방해가 많은 것은 옳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방해가 많다면 옳은 길입니다.

공격이 많다면 가야할 길입니다.

방해나 공격에 나의 길을 멈춘다면 우리는 세상에 쉽게 다루어진다.

13.

교회, 복음, 선교의 일 가운데도 어김없이 방해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서부터 복음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즐비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온다.

눅15:1~7,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입니다."


14.

이 비유는 논쟁이 되고 있는 도마복음에도 나온다.

도마복음107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천국은 백 마리 양을 치는 목자와 같다. 그 양들 중 가장 큰 양이 길을 잃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서 일어버린 것을 찾아 다녔다. 마침내 그 양을 찾아낸 목자가 이르기를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라고 했습니다.


15.

무슨 차이를 발견했는가?

도마복음은 마치 목자가 가장 큰 양에 관심하는 것처럼 말한다.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녀삼아 주셨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부터 이어져온 가짜복음은 세상적 가치로 하나님의 축복을 논하려든다.

 

16.

첫 번째 가짜복음 :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잘되어야, 좋은 학교 나와야,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궁핍하고 못났으면 덕이 안 된다고...

누가 그렇게 말했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위 그 당시에 루저들이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보다 무시 받았던 이유는 그 제자들이 별 볼 일 없었던 것이 한 몫 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잘못 뽑으신 것인가?

게다가 그들 중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17.

진짜 덕이 안 되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말마다 부정적이고, 사람과 사귈 줄 모르고, 사랑이 없는 이들입니다.

자기만 잘났다고 하고, 자기만 괜찮은 척 하고, 자기만 믿는 사람들입니다.

남 섬길 줄은 전혀 모르고, 약속이나 책임감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믿는다고 떠들어도, 

그들이 아무리 좋은 직장 다니고, 돈 잘 벌고, 똑똑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한 사람만이 진짜 성공한 사람입니다.


18.

두 번째 가짜복음 : 아무문제 없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정이나 개인에게 아무 문제없기를 바란다.

소위 마음의 평안을 찾아 헤매고, 조금이라도 문제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무 문제없고, 걱정거리가 없는 삶을 편안한 삶, 행복한 삶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은 아프거나 고민거리만 생겨도 영성에 문제가 있는 줄 안다.

그것은 영적 증상들을 영적 질병과 혼동해서 오는 결과다.

다시 말하면 고민, 걱정, 분노, 문제들을 죄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기 말하면 영적 증상들은 죄가 아니다.

삶에 대한 고민을 해야하고, 문제들을 통해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결혼생활의 문제를 통해 관계성이 다듬어져가고,

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의 문제 속에서 성장이 이루어진다.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더 나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죄가 아니다.

죄는 고민의 끝을 저주로 끝내고, 문제의 끝을 원수로 끝내는 것입니다.


19.

요14:27,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20.

베드로는 아무 문제없이 인생을 보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까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그 때, 그는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눅5:8,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21.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다.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다.

아무 문제없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울 수 있고, 누구나 좌절할 수 있습니다.

싸울 수도 있고, 갈등도 할 수 있습니다.

싸우거나 갈등하거나, 슬퍼하고 좌절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좌절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죄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22.

아무 문제없으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된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되고, 문제 생길 때마다 피해 다니면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으니까...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할 것은 문제를 피해 다니려고 하는 자신을 두려워하라.

설교가 당신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파문을 나아야 한다.


23.

세 번째 가짜복음 : 내가 하나님께 잘하면 축복받는다.

최근에 미국의 한 교회에서 [십일조 90일 챌린지]라는 것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내에서 선풍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내용은 십일조를 내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고, 만약 90일 이내에 축복을 받지 못하면 환불해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선뜻 그럴싸한 도전 아닌가?

분명 축복받는다는 확신이 있지 않나?


24.

2가지에서 틀렸다.

첫째, 십일조 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면 축복받는다.

축복은 내가 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축복은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길을 걸어가야 하나님의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데 사용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닌 축복은 축복이 아니다.


25.

둘째, 말라기3:10을 근거로 한 십일조는 지금 우리가 내는 돈이 아니다.

그 십일조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이제 우리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한다면 삶을 드리면 축복을 받는다가 맞다.


26.

아이가 어릴 적에는 아빠를 그리워한다.

아빠하고 달려오고, 아빠만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아빠보다 아빠에게 들려있는 봉투를 먼저 본다.

아빠의 능력을 보고, 아빠의 재산이나 가진 것을 본다.

그 때는 아버지를 잃는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더 바라게 하는 복음은 가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더 집중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그분의 손에 들린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27.

어리석은 예지만 당신이 지금 연애를 하는데 남자의 배경에만 관심한다면 당신은 제정신인가? = 사랑하고 있는 것 맞는가?

우리가 사는 것은 그분의 함께하심 때문이지 주신 선물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분의 긍휼 때문이지 주신 은사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받은 물질의 축복으로 천국갈 수 없고,

내가 받은 재능의 축복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구원 티켓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 나의 믿음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직 그분이 계셔야 나를 변호하시고 구원하신다.


28.

진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다.

진짜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이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진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29.

홈쇼핑에 보면 제품을 팔기 위해 여러 가지 보너스 상품을 나열한다.

나는 마켓에서 뭔가 서비스로 주는 것에 현혹될 때가 많다.

정작 본 제품에는 관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바라게 하는 복음은 가짜다.


30.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은 거리낌 없이 보면서, 자신은 월계관을 쓰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로 보좌에 오르셨는데 우리는 환호하는 군중의 무등을 타고 보좌에 오르기를 기대해서야 되겠습니까? 헛된 상상일랑 하지 마십시오. 어떤 희생이 따를지 계산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면 동아가 당신의 농장과 사업을 의지하십시오. 다만 당신의 귀에 이 말을 속삭이고자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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