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18~20 그런데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침상에 눕힌 채로 데려와서는, 안으로 들여서, 예수 앞에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리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여놓을 길이 없어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그 자리를 뚫고, 그 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무리 한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연휴의 시작이네요. 쉼에도 사명이 있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사명, 내 몸과 마음을 리셋하는 사명에서부터 영적인 출발점인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명도 있습니다. 그래서 쉼이 예배가 되기도 하죠. 이번 연휴는 이에 더해 가족들과의 관계가 더해지는 사명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나에게 주신 가족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섬기는, 그래서 웃음꽃이 피어나는 귀한 안식의 자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도 잘 아는 유명한 본문이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의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이전의 이적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이적 사건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죠. 물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죠. 그들은 바로 중풍병자의 친구들입니다.
내용은 아시다시피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그를 고치고자 침상채로 들고 예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던 모양입니다. 주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집 주변이 인파로 가득 찼던 것 같아요. 아무리 호소를 해도 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최후의 수단을 씁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어버린 거죠.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이들의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무모하다는 말로 덮기 어려운 문제점이죠. 그것은 일단 그들은 새치기 중이었다는 거죠. 아마도 예수님 앞에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아요. 중풍병자 친구들이 길을 열 수 없었던 것은 거기 모인 병자 중에 중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자신의 처지가 순서를 양보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들은 그 순서를 파괴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순서의 질서를 파괴한 문제가 있죠. 문제는 또 있습니다. 집을 파괴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남의 집을 함부로 부수죠. 이것은 폭력입니다. 이는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히는 행위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고 믿음이라고 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많은 이가 착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마치 지붕을 뚫는 무모한 행동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마치 나를 위해서는 남의 피해 정도는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착각이 그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오늘날, '내 믿음은 사회의 질서 정도는 파괴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죠.
그러나 저는 예수께서 보신 믿음은 이런 무모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질서 파괴가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주님이 보신 믿음은 공동체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온 이들이 몇 명인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복수임에는 틀림없죠. 더 나아가 오늘 본문의 평행본문인 마가복음 2장에는 그들이 4명이라고 밝히기도 하죠. 4명 정도라면 합리적입니다. 침상을 들려면 4명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4명이 중풍병자를 고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예수께로 가면 고칠 수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왔겠죠. 더 나아가 길이 막히자 그들은 '모두'가 지붕을 뚫자는 데 동의합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중풍병자를 고치는데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9~20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자리',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동체의 믿음에 대해 강조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만큼 함께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교회가 회중, 그러니까 공동체를 의미한다는 것도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역사하는 힘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의 믿음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같은 뜻을 모아 함께 일하는 공동체의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시죠. 우리 공동체에도 한 마음으로 기도할 일들이 많습니다. 같은 생각, 같은 마음, 같은 꿈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바라고 꿈꿀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죠. 그러니 혼자 기도하지 마세요. 생각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세요. 혼자 꿈꾸지 마세요. 비전을 나누고 함께 꿈을 꾸세요. 혼자 은혜받지 마세요. 감사와 기쁨을 서로 공유하며 은혜 속에 공동체의 향기가 나도록 함께 하세요. 우리 공동체는 그렇게 믿음의 공동체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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