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의 본문이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에 많은 중풍 병자를 고치셨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중풍 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말씀과 치유의 사역을 행하고 계셨죠. 그날도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는 이전과 조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주로 바닷가나 넓은 공간 등이 배경이었는데요. 그날은 장소가 달랐습니다. 넓은 공간이 아닌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의 집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와같이 장소가 달라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 이유를 ’누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죠. 그날 유대 전역에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이 찾아왔다고 말이죠.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들의 방문 목적이 좋을 리는 없죠. 아마도 무언가 트집을 잡기 위한 방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누가'는 지금 예수님께서 어떤 이의 집에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시는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집이 이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의 방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이 그 집에 들어와 예수님 앞에 둘러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전에 그 집 주인과 연락이 되어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죠. 이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인파들이 몰려 바닷가에 배를 띄울 정도였는데요. 지금은 장소가 집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큰집이라 하더라도 그런 인파를 다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러다 보니 그 집 주변은 통행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집 마당은커녕 집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중풍 병자 일행이 나타나죠. 중풍 병자는 병세가 악화하였던 모양입니다.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병상에 누운 채로 실려 왔던 거죠.
그를 병상 채 옮긴 이들은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는 이들을 그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죠. 특별히 그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는 남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에서 유추해야 하죠. 그들은 중풍 병자와는 아는 사이였을 테죠. 그래서 첫 번째 범주는 이웃들일 겁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웃이라고 해서 그를 이렇게 둘러업고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까운 이웃이었다는 이야기죠. 이 또한 거리상의 가까움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아픔을 알고 함께 안타까워했던 이들, 평소에 늘 낫기를 바랐던 이들일 테죠. 그들을 특정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티비에 나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죠. 더 나아가 문제의 해결이나 치유를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후원금을 보내거나 찾아가서 위로하거나 또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적극적인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중풍 병자를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리고 달려와 알려주죠. 알려줄 뿐만 아니라 함께 가기를 자처합니다. 나중에는 지붕까지 뚫으며 포기를 모르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는 진심으로 중풍 병자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가족이나 혹은 믿음의 친구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본문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이들의 행동을 보며 믿음으로 포장하는 메시지를 많이 보게 되죠. 그들이 중풍 병자를 위해 남의 집의 지붕을 뚫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고 믿음의 무모함이라는 이름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가는 행태를 목도할 때가 있어요. 그것이 저는 못내 아쉽습니다. 마치 그런 무모함이 믿음이라 말씀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무모한 행동을 해도 되는 것처럼 오인할 때가 있죠. 믿음이라는 말로 사회적 질서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것을 보죠. 공공장소에서 소리높여 외친다거나 원치 않는 방문을 하여 강압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치 믿음처럼 여기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께서 주목하신 믿음은 그들의 무모함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들이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원함을 이루는 것을 주님께서 믿음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남의 재산권이 파괴되든, 지붕을 뚫다가 누군가 다치든 상관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내 친구 중풍 병자만 나으면 그만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이기심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 중풍 병자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다음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죠. 죄 사함에 대한 묵상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해서 묵상해야 할 내용은 ‘사람들’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 부분이 신기하다고 말한 이유는 예수께서 보시기는 ‘사람들’의 믿음인데, 고치신 것은 이 ‘사람’의 병이거든요. 제가 주목하는 것은, 저 사람이 아니고 왜 이 사람이냐가 아닙니다. 차이는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아니라는 거예요. 차이는 ‘들’입니다. 사람들의 ‘들’ 말이죠. 그러니까 복수형과 단수형의 차이라는 거죠.
저는 지난 금요일 매일 묵상에서 이 ‘사람들’에 대해 제게 주신 묵상을 나눈 바 있습니다. 그때 나눈 말씀 가운데 주님이 보신 믿음은 그들의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한 행동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친구인 중풍 병자를 고치고자 했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친구를 예수 앞에 데리고 가자 누군가 말했을 때 긴가민가하는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소문이 퍼졌어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진실되게 믿지 않았다면 모두가 합심하여 그 병자의 침상을 들지 못했을 테죠. 어디 그뿐입니까? 어렵게 침상을 들고 왔는데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도 ‘여기가 끝인가 보오’ 했다면 아마 그 중풍 병자는 고침 받지 못했을 거예요. 이들은 하나같이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막히면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죠. 그러니 방법을 찾은 겁니다. 그것도 같은 마음으로 말이죠.
계획은 누구나 세웁니다. 새로운 마음은 누구나 가져요. 그런데 그것을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나가 아니죠. 조금만 걸림돌이 생기면 이게 아닌가 보다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누군가 방해를 하면 그 참에 주저앉고 말죠. 그때 나를 잡아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함께 길을 가주고 함께 위로와 격려를 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래서 믿음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고난을 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 길을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함께 기도하고 함께하는 이들로 인해 우리의 믿음은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 겁니다.
성경은 초대교회의 첫 형태를 헬라어로 오이코스라고 불렀습니다. 오이코스의 본뜻은 집, 혹은 가정이라는 의미인데요. 초대교회는 그렇게 가족처럼, 가정과 같은 공동체, 즉 확대된 가족, 저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영적인 가족을 의미하죠. 왜 이 가족이 필요하냐면 나의 믿음을 지키게 만드는 중요한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복수인 겁니다. 함께 해야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끊임없이 함께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말도 했죠.
전도서 4:12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함께하는 곳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해야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것은 그 함께였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함께 하며 서로를 지탱했기 때문이에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닙니다. 긍정적인 친구를 곁에 두어야 하죠. 긍정적이라는 것은 누차 말씀드리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 다가 아니에요. 오늘 중풍 병자의 친구들도 고비가 많았습니다. 중풍으로 친구가 쓰러졌을 때 포기하는 친구들도 있었을 거예요. 오늘날에도 중풍은 중한 병입니다.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병이죠. 그런데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 계속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는 회복될 수 있다'고 말이죠. ‘너는 살 수 있다’고. ‘너는 잘될 것’이라고. 누군가는 헛된 희망이라고 몰아붙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었기에 그들은 지붕까지 뚫을 수 있었고, 기어코 주님 앞에 설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 말이 그들 가운데 있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다는 말에 그들은 반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하면 현실이 어쩌니, 삶이 어쩌니 하며 콧방귀 뀌는 이들이 있습니다. 냉소적인 이들이 있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뭐든 안 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공동체를 우리가 만든다고요. 그렇게 늘 냉소적으로 웃고 떠들고 마치 그러면 멋진 것처럼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 깊은 곳에는 주저앉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차죠. 뭘 해도 안 되고, 걸림돌이 생기면 더욱 하기 싫고, 단번에 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그렇게 시간을 소비하는 인생으로 점점 내 몰리죠.
믿음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내 안에 믿음의 뿌리가 자라나야 어떤 기회, 어떤 계기를 통해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그런 생각을 함께하지 않았다면 누워있는 친구를 둘러업고 뛸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은 거기에 그치지 않죠. 갔는데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먹고 뛰어왔는데 손도 써보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어쩌면 이 순간 대부분 포기할지도 모르죠. 우리는 그런 말 많이 합니다. ‘할 만큼 했다’라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순간이죠. 그때 또 다른 친구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저쪽을 보니 지붕이 있다고요. 거기로 올라가자고 말입니다. 이 친구들이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이들이었다면 아마도 그 말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을 찾는 것이죠. 나쁜 일보다 좋은 일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절망보다는 기대를, 평가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믿음이죠. 긍정의 사람은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선택을 하는 사람이죠. 좋은 선택을 말입니다. 어쩌면 포기하고자 하는 친구도 있었을 거예요. 위험하다고도 했을지 모릅니다. 이건 주거침입이라고 법률적 해석을 하는 이도 있었을 테죠. 그런데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합니다. 이 친구를 살릴 수 있다면 벌금도 내고 감옥도 가겠다는 각오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그 모든 것을 거뜬히 감당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이르자 다시금 믿음이 살아납니다. ‘해보자’하게 되는 거죠. 이게 공동체의 믿음이에요. 넘어지려고 할 때 함께 일으켜주는 이가 있습니다. 쓰러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것은 어렵죠. 그때 곁에서 도와주는 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믿음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그러시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을 고치신다고요.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으로 가장 유익을 보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나의 생명이 지켜집니다. 가능성과 기대를 품은 공동체를 통해 미래를 여는 것은 우리예요. 뭐든지 안 된다고 말하고, 힘들다고 말리는 부모 밑에서 자녀는 주눅이 듭니다. 늘 불안과 두려움에 분노를 일삼는 부모 밑에서 자녀는 불안정하죠. 똑같습니다. 내 주변이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있고, 하는 일마다 부정적인 포스를 풍긴다면 나 역시 걸음걸음마다 늘 불안할 거예요. 그러니 평소에 좋은 공동체를 만드세요. 내가 건강할 때 좋은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세요. 그러면 내가 쓰러지고 넘어질 때 그 공동체가 나를 다시금 세워줄 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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