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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11 - 우리의 괴로움은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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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27~28   그 뒤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마치 월요일 같은 기분이네요. 긴 연휴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그래서 기대가 크죠. 전에도 말씀드렸죠? 좋은 쉼의 완결은 그 끝이 행복해야 한다고요. 다시 말해 쉼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기대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쉼은 다시 일상에서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 아침에 우리에게 그런 기대와 부푼 소망이 몰려오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모으십니다. 이번에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죠. '레위'라고 하면 낯설지만 '마태'라고 하면 익숙한 이름입니다. '레위'는 본명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마태'는 헬라식 이름이겠죠? 마태복음이 그의 작품이기에 우리는 '마태'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세리였다는 것을 알려줄 뿐, 성경 어디에서도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제자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 등의 기록이 없어서 그에 대해 알 길이 없죠. 이렇게 그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이유가 혹시 세리라는 직업 때문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복음서를 보면 언제나 마태는 마지막 부분 등장하기도 하죠. 이는 유대인들이 세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에게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리는 유대 공동체에서 왕따 취급을 받았죠.

 

세리가 그런 취급을 받는 데는 세리의 역할이 한몫했습니다. 로마시대 세리는 단순히 세금을 걷는 직업이 아니었거든요. 물론 정해진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받치는 일을 도맡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의 돈을 거두어 로마에 받치는 것만으로 그리 미움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유대 세리에게는 다른 권한이 있었는데요. 로마에 정해진 세금을 바친 후에는 기타 세금에 관해서는 오로지 세리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각종 별의별 명목을 달아서 세금을 징수하고 착복하기 일쑤였죠. 오늘 본문에 보면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는 기록이 있죠. 이는 오늘날처럼 특별히 세관이라는 기관이 있어서 그 건물 안에 앉아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마도 바닷가 어딘가 앉아서 물고기의 거래에 세금을 매기기 위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론 통행세라는 명목으로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에게서 세금을 받아내기도 했죠. 그러니 좋게 보일리가 없었죠.

 

그런 마태를 지금 주님께서 부르고 계시죠. 물론 여기에는 부르신 주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죄인이든 악인이든, 가난하든 소외되었든 가리지 않고 그 어떤 누구도 다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선을 잠시 돌려서 마태의 입장에서 이 본문을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본문은 마태가 예수님과 처음 보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마태가 아무 일 없듯이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찾아와 부르시니 갑자기 따라나선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갑자기 그 순간 마태가 무슨 번개라도 맞아서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까요? 주님이라면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런 상황 전개는 너무 소설 같잖아요? 조금이라도 개연성을 가지려면 그 안에 흐르고 있는 마음의 변화들을 찾아야 합니다. 

 

아마 마태는 고민이 많은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 본문에서 뜬금없이 레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요. 이는 그의 출신성분을 알려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다른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위라는 말의 뜻이 '하나님과 연합하다'라는 것이거든요. 그 뜻을 대비해 보면, 마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저변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죠. 그런데 그가 세리가 되었어요. 당시 세리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죠. 부자를 폄훼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세리들은 부당한 방법을 동원하여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기 원하는 마태가 세리로 살 때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만 행동은 세상적인 채움을 바라고 있었다면 그 안에 영적인 갈등이 없지 않았겠죠. 그래서 마태는 말이 없고 조용했는지도 모릅니다. 늘 고뇌에 찬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그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십니다. 마치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이의 팔을 건드려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가듯,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의 고뇌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죠. 

 

믿음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적 있죠? 갑자기 회개의 마음이 들어서 지금까지 걷던 길을 접고 새로운 길을 걷는 이는 없습니다. 모두 다 웜업의 과정이 있죠.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에 보면, 재산을 다 잃고 갖은 고생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때 부자로, 허랑방탕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 고생은 더욱 비참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큰 그림으로 생각하면 그 고생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지난주 묵상한 중풍 병자의 이야기를 보면, 중풍은 결코 걸리고 싶지 않은 중병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께서 오랜 고생을 하셨던 병이 바로 이 병이어서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병인지를 잘 압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 험한 병이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기적을 맛보는 준비과정이었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 또한 그 준비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때론 외부의 문제로 인한 것이든, 삶의 고난과 고비가 닥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준비과정일지도 몰라요. 내 안에 괴롭고 힘든 어려움이 찾아올 때, 그때가 주님이 나를 찾으시는 그런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시간을 끌지 마세요. 그때는 객기 부리지 마세요. 그때는 아집을 버리고 속히 응답하셔야 합니다. 마태처럼 말이죠. 그래야 우리의 괴로움은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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