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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42 - 사소취대(捨小取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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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3~12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나와 바나바에게만은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자기 비용으로 군에 복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 떼를 치고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사람의 관례에만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십니까? 율법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기를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를 걱정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서 밭을 갈고, 타작을 하는 사람은 한몫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습니다.


바울은 많은 오해와 공격들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비단 사도의 자격 논란이나 출신 배경에 대한 공격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공격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을 위해서 헌금을 하지 말라는 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명실공히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죠. 그리고 바울은 선교에 나서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린도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죠. 그런데 바울의 사도권이나 지도자 자격을 빌미로 지원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인 문제도 입방아에 올랐던 모양이죠. 아무튼 흠을 잡으려고 무단히 애를 쓴 모양새입니다. 

 

이런 흠은 대체로 헌금과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매우 부유한 교회였죠. 도시 자체가 경제력이 있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인물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은 남을 지원하는데 인색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는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지적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아무튼 바울은 이런 반대자들의 논리에 대해 자신의 권리로 반박합니다. 자신이 한 일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본다면 그에게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죠. 더 나아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권리가 주어진다는 점도 분명히 합니다. 일을 했으면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밭을 간다면 다 수확을 하기 위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하죠. 

 

우리에게는 권리가 참 중요합니다. 오늘날처럼 공정을 무슨 역사적 사명으로 생각하는 시대에서는 '권리'라는 것이 마치 목숨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죠. 일하면 일한 만큼 얻어야 하고, 애를 쓰면 쓴 만큼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은 정부 시스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치죠. 그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정부를 불신하듯 믿음도 불신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 권리가 진리임에는 틀림없음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진리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더 큰 것을 위해 나의 권리를 잠시 뒤로 미룰 줄 아는 것입니다.

 

마시멜로 효과라고 하죠? 심리학 용어로는 만족지연 능력이라고 하죠. 저는 눈앞에 보이는 마시멜로를 보면서 왜 15분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참을성 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실험에 대해 신뢰하기는 시대적인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불변하는 진리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불편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단적인 예로 차를 탈 때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잠시 동안 행동을 제약하는 벨트를 메야합니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어도 공연장이나 공공장소에서는 나의 자유를 잠시 제어해야 합니다. 거기서 마음대로 떠들거나 담배를 피울 수는 없죠. 우리 집 거실에는 이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죠. 사랑이 인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 널려진 작은 문제들에 참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큰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작은 권리들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게으름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고요. 정말 기도하기 원하면, 내 머리를 채우고 있는 자유로운 다른 생각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놀 권리를 잠시 포기해야 되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나쁜 생각을 할 자유를 잠시 접어 두어야 합니다. 

 

고사성어에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은 버리라는 말이죠. 바둑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다 보면 큰 것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늘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 세상의 권리를 잠시 미루는 것이고, 기도하는 소망을 위해서 오늘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권리 포기가 큰 권리를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하루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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