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36~40 어떤 이가 결혼을 단념하는 것이 자기의 약혼녀에게 온당하게 대하는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면, 더구나 애정이 강렬하여 꼭 결혼을 해야겠으면, 그는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결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니,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십시오. 그러나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사람이, 부득이한 일도 없고, 또 자기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서, 자기 약혼녀를 처녀로 그대로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으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자유가 있습니다. 다만, 주님 안에서만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의견으로는, 그 여자는 그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결혼관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가 권면하는 태도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몇 번이고 이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강조하는 데서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읽을 수 있죠. 아마도 그런 태도는 독신을 주장하는 것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나 자신이 자란 배경과 대치되는 태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다른 접근을 하자면 당시 성적인 타락의 문제에 대한 경계의 일환으로 결혼관에 대한 권면이 작동했을 가능성도 있죠. 대체적으로 깔끔한 그의 논리와 확고한 주장과는 달리 고린도전서 7장의 내용은 조금 구차해 보일 정도로 장황합니다. 그만큼 조심스럽다는 느낌이죠.
어떤 이들은 고린도전서 7장을 읽으며 그의 확고한 결혼관에 대해 강조를 하지만 사실 바울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들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죠. 물론 이 시대의 상황과 안 맞는 것도 있고, 생각의 차이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던 이유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의 결혼관이 어떤 의미에서의 주장인지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 조심스러움의 가장 큰 원인은 사회적인 배경이나 관습에 대한 저항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율법학자들은 결혼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죠. 그런 의미로 이미 바울이 결혼을 했던 적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는 마치 결혼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여기고 있는 듯 보일 정도죠. 그런데 바울은 그런 관습과 전통에 역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관습이나 율법에 대한 저항만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있었던 사회 분위기에 대한 역행이기도 하죠. 성적인 타락과 무분별한 관계들을 가볍게 여겼던 당시 분위기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본문 7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결혼관이 단순하게 남녀의 결합으로 인한 가정을 꾸미는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변혁의 문제, 혹은 그리스도인의 의식 변화의 문제로 보여요. 이를테면 이런 태도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편견들이 존재합니다. 어제도 언급했지만 마치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실패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들의 시선만이 아닙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낙오자나 실패자 취급을 하며 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자신의 선택을 폄훼하는 것일까요? 이혼 문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들 쉬쉬하죠. 이혼하는 것은 무슨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혹은 참을성이 없거나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하죠. 왜 그럴까요? 재혼하면 안 됩니까? 한번 실패하면 영영 혼자 살아야 하나요? 물론 요즘에는 이런 생각들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남들이 다 혼자 사니 나도 혼자 살아야 합니까? 사회가 이혼이 대세고 재혼이 필수인 시절이니 나도 이혼하고 재혼하고 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남들의 시선에 나의 선택을 맡겨야 합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을 살아야 하죠?
저는 이혼을 정당화하거나 비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회적 편견이 내 인생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에요. 남이 대신 살아주는 인생은 없습니다. 남의 시선에 따라 내 인생을 선택할 수도 없어요. 나는 나일 뿐입니다. 생명이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 사회가 생명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이 사회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혁명이 되어야 하죠.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만들어준 그릇에 담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우리들이죠. 좁디좁은 관습과 규율로 사는 우리가 아니라 넓디넓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사는 우리입니다. 그러니 나를 편견으로 묶어두지 마세요. 죄로 나를 규정하지 마세요. 나의 실수로 내 발목을 잡아두지 마세요. 우리는 편견을 뚫고, 죄를 넘어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나의 올무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규정지을 수 없어요.
오늘도 수많은 편견과 규정이 나를 묶으려 할 거예요. '나는 이것밖에 못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 '저런 건 꿈도 못 꿔' 그렇게 내가 묶은 자리에서 나는 한 발짝도 못 나갈 거예요. 이 아침에 그 올무를 풀고 나가세요. 내 스스로 규정한 내가 아닌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정하는 나로 하루를 보내세요. 누군가 만들어 놓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그 사람, 하나님께서 재능과 뜻과 은혜를 부어서 만든 그 사람으로 오늘을 사세요.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로, 내가 평가하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로 오늘을 채우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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