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17~19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에서 명하는 지시입니다. 할례를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그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지 아니한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17절부터는 다른 주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분수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라고 선포하죠. 이게 무슨 뜻일까요? 조금 더 읽어보면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할례를 받은 사람들, 그러니까 유대인으로서 규율과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이죠. 그들에게 굳이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로 보아 유대교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 가운데는 유대교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할례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겠죠. 다만 숨기고 가리려는 이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숨기고 가리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요? 전향이라고 하죠. 어떤 진영에서 다른 진영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는 인간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방법처럼,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려는 것처럼 쓰는 방법이 있죠. 그것은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고 공격하고 저주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몸 담았던 곳, 사람들, 모습들 모두를 악으로 몰아가는 방법으로 자신이 그쪽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교인 가운데 그런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는 굳이 유대교에 몸 담았던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 물론 이들은 이방인 들이었겠죠? 그들은 또 할례를 받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요. 그 당시 할례 논쟁도 치열했죠.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이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또 할례 받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죠.
그러니까 이는 자신이 지내온 과거를 부정하고 저주하며 자신의 현재를 증명하려는 그런 노력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에게도 있죠. 말만 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합니다. 재미있게 본 드라마 중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요. 거기서 우스게 소리가 나와요. 의사 중 한 사람이 식탐이 있어서 입이 터질 듯 먹죠. 그런 친구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말하면 꼭 하는 말이 있었어요. "오빠가 3명이라 그래" 오빠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생존경쟁(?)을 해 왔다는 이야기죠. 가볍고 재미있는 말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이런 식으로 살아가죠. 내가 지금 있는 처지를 늘 과거의 무슨 문제에 의한 결과물로 여기는 겁니다. 이런 말도 많이 하죠. 나에게 있는 상처, 버릇, 습관, 이것들 모두 과거의 어떤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요. 죄송하지만 건방진 말 한번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후회나 회한으로 살지 마세요. 지난주, 장례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의 장례였어요. 지병이 있다 보니 가족들이 돌보시느라 많이 고생하셨던 것을 제가 압니다. 어떤 가족도 그렇게 못했을 헌신적인 돌봄을 가족들이 했죠.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니 모두 너무 아파하시더라고요.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잘못해서 돌아가셨다.' '내가 더 잘 돌볼 걸 그랬다' 이런 말씀뿐이더라고요. 정말 사랑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런데 제가 그 가족들에게 그랬어요. 그것은 고인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라고요. 위로예배 설교 제목이 그랬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그분의 삶이 된다'고요. 그래서 좋았던 일만 기억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프지 않았던 모습만 기억하라고요. 상처나 안 좋았던 모습이 아니라 나에게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기쁜 일, 그리운 일, 추억이 될 아름다운 일만 기억하라고요. 내가 불쌍하다 여기면 고인은 그저 불쌍한 삶을 산 것이고, 내가 잘못했다 여기면 그는 늘 가족의 잘못된 돌봄만 받다가 간 인생이 된다고요.
나의 과거에도 다 계획이 있습니다. 나의 과거에도 다 은혜가 있어요. 잘못되고 아픈 역사에도 다 교훈이 있고, 삐뚤어지고 어긋난 시간 속에서도 다 소망이 있습니다. 후회한들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탄식한들 다시 살 수 없어요. 우리가 살아야 할 시간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모습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살아내는 시간이에요. 진정한 회개는 어제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입니다. 아무리 가슴을 치며 참회를 해도 오늘 나의 삶이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은 어제의 죄인인 내가 아니라 지금, 오늘, 이 순간,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느냐? 하는 것뿐이죠.
어제 힘드셨나요? 후회하는 일들이 있으세요? 이 시간 털어내세요. 오늘은 리셋된 나로 시작하세요. 어린 시절 왜 그랬는지, 국어시간이 되면 수학 시간이 걱정되고, 수학 시간이 되면 영어시간이 걱정되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국어시간에 수학책 꺼내 읽고, 수학 시간에 영어책 읽고 했어요. 이상하죠? 우스우신가요?^^ 그런데 나만 그런 건가요? 알고 보니 이게 딱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라더라고요. 불안함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 말이죠.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저 오늘로 사세요. 어제까지 산 나를 칭찬하시고, 오늘은 새롭게 시작하세요. 오늘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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