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3~14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있죠?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오늘 본문에 이와 비슷한 당시 또 다른 유행어가 등장합니다.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이죠. 이 말을 현대적 의미로 번역한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적어놓았더라고요.
"처음에는 살기 위해 먹지만, 나중에는 먹기 위해 산다"
본말전도라고 하나요? 처음과 끝이 바뀌었다는 뜻이죠. 이는 핵심적인 것은 뒤로 미루고 곁가지 사소한 것에 정신을 팔려 일을 그르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 구절에 드러나는데요. 이미 아시다시피 고린도는 자유분방한 의식을 가진 도시였죠. 항구도시가 주로 그렇죠. 특히 성적인 문제에는 뭐라고 할까요? 개방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주로 했던 것 같아요. "몸은 섹스를 위해 있다"라고 말이죠. 그런 말로 성적인 문란함을 합리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생각은 고린도 교회 안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이 영향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아마도 영지주의 사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들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극단적 이원론에 빠져 영혼은 고결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주장을 했죠. 그러다 보니 육체에 대한 본능을 죄악시하여 철저히 제한하는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본능 자체를 죄로 보고 쾌락에 빠져도 영만 고결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고린도 교회에 지금 문제가 되는 이들은 후자의 경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침에 성적인 문제, 특별히 섹스라는 단어를 묵상하는 자리에서 적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있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저는 섹스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아름답고 고귀한 놀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속에서 가장 귀한 생명이 만들어지고 가족이 탄생하는 것이니까요. 우리나라에는 촌수가 있죠. 부모 자식 간은 1촌, 형제간은 2촌, 이런 식의 촌수가 있어요. 그런데 부부는 촌수가 없죠. 그 관계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놀이로 주신 거룩한 선물이 섹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놀이가 헤픈 놀이가 된다면 어떨까요? 제가 굳이 시대와 동떨어진 사고로 순결이나 정절 등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들이 있죠. 그 소중함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죠. 가령, 친구가 있습니다. 소위 베프라고 하죠.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 물으면 여러분은 몇 명이나 될까요? 아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반 전체라고 말하거나 전화기에 적힌 연락처의 모든 사람을 베프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몇 명의 소중한 사람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있는 것이죠. 그 베프들과만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습니다. 속 마음을 털어놓는다거나 밤새 수다를 떤다거나 매일 수시로 통화 내지는 문자를 주고받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베프를 만들고, 그것이 소중한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섹스가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능을 저주하는 것도, 제한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닙니다. 마치 본능은 저질이고 나쁜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는 금욕적인 정서에서 자랐죠. 그렇다고 우리 속에 없는 것도 아닌데 마치 없는 것처럼 숨기며 살았습니다. 이 또한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에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다고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주신 선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만이 우리의 옳은 태도죠. 올바른 사용이라는 표현조차 오해의 소지가 있어 한마디 덧붙이자면, 올바른 사용이란 각자의 선택일 뿐 어떤 규정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선물은 자신에게 맞게 스스로가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주어진 사랑의 약속이기 때문이죠.
바울은 우리에게 목적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이죠. 우리는 그의 창조물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면하죠.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 태어났고 그분을 위해 삶을 삽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정의죠. 다만 그분을 위해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새로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말로 수많은 헌신과 행동들이 있죠. 전도를 하고 선교에 나서는 것, 누군가를 돕고, 봉사하는 것,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나 봉사가 주님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잘 해석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남을 위해 돕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도울 때 행복하기 때문에 남을 돕길 바라시는 것이고, 우리가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할 때 기쁘기 때문에 그 일을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천 명을 전도하고, 억지로, 혹은 드러내기 위해서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운들 주님이 기뻐하실리 결코 없습니다. 오직 내가 기쁘고, 내 안에 감사가 넘치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기에 그 일이 값어치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마음이 편안하길 원하시고,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시간들이기를, 늘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위해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잘 사는 것, 그것만이 주님을 위하는 일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 그것만이 주님을 위한 사역이죠. 그러니 오늘도 기뻐하세요. 오늘도 평안하세요. 그것만으로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묵상하는말씀 > 고린도전서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 32 - 우리가 살아야 할 시간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0) | 2022.02.16 |
---|---|
고린도전서 31 - 좀 더 큰 물에서 노세요. (0) | 2022.02.15 |
고린도전서 30 - 단순해지세요. (0) | 2022.02.14 |
고린도전서 29 - 사명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가치 있습니다. (0) | 2022.02.11 |
고린도전서 28 - 우리는 성전일 때 가장 빛나고 멋집니다. (0) | 2022.02.10 |
고린도전서 26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합니다. (0) | 2022.02.08 |
고린도전서 25 - 우리는 반드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될 것입니다. (0) | 2022.02.04 |
고린도전서 24 -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0) | 2022.02.03 |
고린도전서 23 -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회복의 능력입니다. (0) | 2022.02.02 |
고린도전서 22 - 나만 잘하면 됩니다. (0) | 2022.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