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몇 주 전에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는 후배 목사님을 만나 이런저런 목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만남은 저에게 늘 새로운 통찰력을 줍니다. 그런데 그 후배 목사님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분의 교회 성도들은 '모든 삶이 예배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이죠. 너무 좋은 말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근심 어린 말투냐고 물으니 뜻밖의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그 말이 모든 시간, 모든 상황, 모든 장소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뜻의 말이 아니라, 모든 삶이 예배이니 특별히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그 말을 쓴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도 그런 류의 의식을 가질 때가 있죠?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데 꼭 말로 해야 하느냐?" 뭐 이런 말이 그런 류일지도 모르죠. 그것은 늘 사랑한다는 말보다 꼭 '사랑해'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쪽에 무게가 더 실려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공부지 뭐"라는 말도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것에서 공부할 것을 찾는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그러니 특별히 공부시간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그러니까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로 변질되는 것이죠.
그 목사님의 근심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말을 하면서 사실은 전혀 다른 뜻으로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모순을 걱정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모든 삶이 예배'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교회에서 특별히 공적인 예배, 시간을 정하고 규칙적이고 구별된 예배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유행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라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다 괜찮아!" "다 좋아!"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유행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이 돌았는지 이미 상상이 가시죠? 이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이 고린도 교회에 퍼진 이유를 우리는 짐작하게 됩니다. 그것이 결코 평안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것이 믿음이나 은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요즘 그런 말을 많이 하고 있죠? '좋은 생각을 하라'라고 말이죠. '생각한 대로, 믿음대로 된다'는 말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 가족들은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기억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대면 예배든, 비대면 예배든,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의 예배는 다 똑같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멋대로, 내 편한 대로 예배드리라는 말은 아니죠.
좋은 생각이란, 내가 기쁘고 감사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란, 내가 웃을 수 있고,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병에서 낫기를 바란다면 잘못될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잘 낫기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옳습니다. 내가 걷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그곳에 길이 있음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걷는 것, 그것이 믿음이죠.
그런데 간혹 우리는 그 믿음과 생각을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소위 내 마음대로라는 착각이죠. 좀 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열망이죠. 그런데 왜 돈을 벌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뭐 잘 살고 싶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습니다. 굳이 남을 돕고자 돈 벌고 싶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어내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마음 편하고, 근심 없이, 기쁘게 잘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남을 위한 일이 생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들이 벌어지리라 저는 믿습니다. 사람은 남을 돕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고, 남과 함께 잘 지내지 않고는 기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자신이 잘 살고자 노력하면 이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창조되었으니까요. 그러니 기쁘게, 즐겁게, 그리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이 없어 억울하고 이로 인해 받은 상처로 돈을 벌고자 한다고 쳐 보자고요. 그렇다면 그것이 내가 원해서 돈을 버는 것일까요? 아니면 억울함에, 혹은 상처의 영에 의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영적인 내면을 보면 그것이 자신이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얽매여서 하는 행동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내 영성을 만들어가는 이유는, 그분 안에서만이 가장 우리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지배를 당한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을 보이죠. 그런데 그게 착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영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되는 거죠. 억울함에, 분노에, 질투와 시기에, 두려움과 불만에 휩싸여 그 영들에 얽매여 살게 된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함을 선언하죠. 어디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죠.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다른 영들, 다른 제한들로부터 자유한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 품에 있을 때 다른 위험과 염려로부터 자유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내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께 있을 때만 우리는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고, 믿음대로 행할 수 있어요.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생각도, 그분의 품도 모르면서 '생각한 대로' '믿음대로'를 외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생각 자체가 자기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정당하고 중독된 삶을 살게 될 뿐이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합니다. 마치 연이 연줄에 묶였을 때만 하늘을 날 수 있듯이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내 스스로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그분을 뒷 배경으로 삼으세요. 내 뜻을 관철시키고 싶다면 주님을 예배하세요.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내 뜻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은 속임수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멀어지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속임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오히려 우리의 생각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 우리의 생각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마치 일곱 귀신이 집을 차지하듯 우리도 모르게 나를 조정하는 다른 영들이 나를 지배하죠. 그러니 기억하세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합니다. 그분 안에서만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일주일에 주일이 하나님의 것이듯이 주님과의 정기적이고 계획적인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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