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7~8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옳고 그름을 위해 공동체 내에서 소송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죠. 그러면서 차라리 손해를 보는 편이 소송을 하는 편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으라는 말씀이죠.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이 좀 불편합니다. 예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다 참고 다 손해보고 다 덮어쓰면서 살아야 한다고 배워서 그것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소화도 못하면서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 그 고통이 쌓이고 쌓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나 지금까지는 소화하고 해결하는 법보다는 그저 쌓아두는 방식의 참음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면은 점점 썩어가고 병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습니다. 소화 불량에, 우울증에, 심지어는 겉모습만 그럴싸한 포장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음만 남아버린 모습을 보게 되죠.
내가 손해를 보겠다는 것은 그것을 감당할 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용서를 한다는 뜻은 용서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죠. 믿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손해를 보아도 웃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용서와 손해만을 강요당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무조선 용서, 무조건 손해만을 외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탓하지도 마세요. 용서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손해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나를 위해 손해를 보신 주님을 떠올리세요. 이미 내가 받은 용서가 크고, 이미 손해를 감수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지금도 여전히 나를 위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능히 그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음을 믿기를 원해요.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죠. 용서하는 자에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용서로 인해 강해지는 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손해 또한 그래요. 내가 남을 위해 손해를 본다는 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손해를 본다면 그로 인해 빈자리를 하나님이 반드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재능을 사용하거나 재물을 쓴다면 그로 인해 생기는 손해를 하나님은 반드시 채우시죠. 그러니 그것이 누구를 위한 일이겠습니까? 이 믿음이 용서할 힘을 만들고 손해를 보아도 아무 문제없는 나를 만들죠. 그러니 용서나 손해에 대한 정의를 바꾸세요.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이죠. 남을 위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나를 채우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이와 함께 바울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와 송사를 하기 전에, 누군가를 미워하기 전에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이죠.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송사를 한번 생각해 보죠. 공동체 내에서 일어난 송사는 아마도 '이 말이 맞네 저 말이 맞네'하는 대립에서 시작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논쟁은 왜 벌어진 것일까요? 그들은 왜 그런 논쟁을 했을까요? 내면의 복잡한 생각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다 한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죠. 바로 교회이고요. 어쩌면 그리스도였을 거예요. 물론 분명 잘못한 사람도 있고, 틀린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 교회를 위해, 공동체와 함께할 방법들을 찾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외부 사람들도 아니었고,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죠.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송사를 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은 다 가까운 사람들이죠. 잘해보겠다고 만났는데 수가 틀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죠. 분명 서로를 위한 마음이었고, 분명 함께하고자 하는 뜻이었는데도 말이죠.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는 상처를 더 많이 받습니다. 먼 사람에게는 상처받는 일이 없죠. 관심이 많을수록, 시간을 많이 보낼수록 우리는 다툼과 상처에 더 많이 노출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격이 안 맞고, 서로 다르고, 혹은 잘못된 생각과 다른 가치관 때문이라는 것이 맞지만, 그보다 먼저는 가깝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에 있고, 같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서는 서로 잘해보려고 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상처가 깊은 겁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남을 해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조언을 한다면서 상처를 주고, 위한다는 명분으로 강요를 남발하기도 하죠. 가까우니까 쉽게 말하고, 편하니까 아무렇게나 말하죠. 그렇게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을 가깝지 않은 사람보다 못하게 대접하는 행태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가까워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 내 의견을 더 강요하고, 편해서 귀를 열고 듣기보다 무시하는 경향들이 우리 안에 있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한 번 보시겠어요?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역경을 뚫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 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것보다 우리는 짧은 의견과 뜻이 안 맞는다고 싸우고 미워하고 무시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같은 편인데, 함께하는 사람인데,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미 그렇게 결단하고 나와 함께 섰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초대교회는 목숨을 걸고 함께 한 사람들인데요. 그 첫사랑을 떠올린다면 지금의 논쟁과 문제들은 다 덮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를 위한 사랑임을 깨닫는다면 지금 내 마음을 괴롭히는 상처를 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사랑하는 가족이니까요. 이미 사랑하는 성도이니까요. 우리의 굴곡진 삶도 마찬가질 거예요. 아픔과 슬픔이 넘실거리고 걱정과 근심이 몰아쳐도 이미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길 안에 있음을 안다면, 그분이 나를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임을 안다면, 웃으며 그 태풍을 맞이할 수 있기 않을까요? 그 태풍조차 나를 위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은 짧은 본문에 장황한 묵상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두자고요. 쉽게 미워하기에는 깊은 사랑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쉽게 삶을 논하기에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깊은 하나님 사랑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싸움에도, 다툼에도, 아픔에도, 슬픔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랑의 역사가 있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 역사를 믿고, 그 뿌리를 믿는 자가 용서도, 손해도 능히 감당하고도 남을 능력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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