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6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에게 일상의 일과 관련해서 송사가 있을 경우에, 교회에서 멸시하는 바깥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앉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도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여 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신도가 신도와 맞서 소송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한다는 말입니까?
6장은 새로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송사의 문제였죠. 그것도 교회 내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세상의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를 다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 내에서 서로 대립과 다툼이 있으면서 이것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죠. 그래서 서로가 법정 분쟁을 벌이는 일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이건 관계에 있어서 끝까지 가버린 상황이죠.
사실, 현재에도 이런 분쟁에 대한 법적 다툼은 다반사입니다. 실질적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법적인 판단이 된지는 꽤 되었죠. 누가 옳고 그르냐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각자의 견해가 있고 입장이 있기 때문이죠. 자신의 문제로 파악하면 옳지 않은 이들이 없죠.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그 조율을 위해 사회의 기준을 정하고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교회법이 있죠. 교회 내의 문제는 교회법으로 치리 하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교회법이라는 것이 강제성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교회법에서 패소를 하면 결국 세상의 법정에 판단을 맡기는 일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세상의 법정에 교회의 문제를 맡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세상의 법정은 교회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여겨서죠.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보다 우선한다는 명분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어찌 사람들이 서로 합의해서 만든 법이 창조주 하나님의 법보다 우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현대 교회는 세상보다 교회가 더 우월하고, 사람들이 합의해 만든 법보다 교회법이 우선한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어떤 이들은 소위 은혜롭지 못하다는 말로 세상 법정에서 다투는 것을 힐난하기도 합니다. 저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세상의 법정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서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가 합의한 질서의 법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죠.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의 질서와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칙으로 정해진 법에 따라 우리는 어느 정도 체계를 잡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법정에서 다투는 것이 꼭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런 복잡하고 가슴 아픈 다툼의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래도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필요하다면 법정도 필요하죠.
문제는 오늘 본문이 세상의 법정에서 다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가슴 아파한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그 다툼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적인 합의를 하거나 화해를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 서로 승과 패를 가리고 나누는 최후의 법정까지 가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또한 용서와 이해, 사랑과 은혜의 나눔을 기초로 세워진 교회에서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씀을 지금 하고 있는 거죠.
그리스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많은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 모든 대답의 뿌리는 바로 '회복의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갈라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 높은 담을 허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성소의 휘장을 지나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 또한 우리의 잃었던 창조의 능력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다 회복의 능력이죠. 그 능력은 우리 안에서 발휘되는 능력입니다. 절망스러운 환경에서 희망을 꿈꾸는 회복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고, 수많은 불의와 억울함,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만들어내는 회복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도 작용을 하죠. 어찌 100% 좋은 관계가 있겠습니까? 어찌 백 날 매끄러운 관계가 가능할까요? 어느 때는 마음에 안 들고, 어느 때는 의견이 안 맞습니다. 갈등도 있고 다툼도 있죠. 기쁘다가도 슬프고, 건강하다가도 아픔이 찾아옵니다. 그 많은 고비와 위기를 넘어 그래도 사랑하고, 이해하는 관계들로 회복시키며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능력이죠. 그 능력을 잃어버린 고린도 교회를 바울은 지금 책망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능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들에게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분위기를 바꾸는 능력이 있어요.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능력도 회복의 능력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처지에서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회복의 능력을 취하라는 말씀이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죠? 이 또한 그렇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죠. 아직 포기하지 않았기에 부르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픈 현실에서 머물지 않고 기도하는 자리로 바꾸는 것도 능력이죠.
새로운 아침입니다. 어제가 아닌 오늘이죠. 이 아침에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길 바랍니다. 어제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든, 어떤 마음과 문제를 가졌든, 어떤 관계로 살았든, 오늘은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회복된 나로 시작하는 오늘이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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