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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28 - 우리는 성전일 때 가장 빛나고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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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9~20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의 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죠. 바울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큰 의미가 있어요. 먼저 유대인에게 성전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지극히 특별한 장소였던 셈이죠. 게다가 철저히 구별된 장소였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장소인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는 곳마다 성전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화평을 이루신 후 성전의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신 것이죠. 그 이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은혜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니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선언이겠습니까?

이전에는 우리의 육신은 늘 죄만 득실거리는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늘 죄에 눌려있고, 죄만 짓는 존재였죠. 그런데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전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건물을 보면서 성전을 생각하죠. 그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처럼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우리의 몸이 곧 하나님을 떠올리는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내가 곧 성전이라는 말에서 저는 우리의 몸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야 하는지에 대해 묵상하지는 않겠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오늘날 이웃에게 비친 교회의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만 그들에게 비치는 모습을 좋게 하는 방법이 해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본질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내가 가장 나답고, 내가 어떤 상태여야 가장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재능이 발휘될 때 가장 멋지죠. 요리사가 요리할 때 가장 멋있고, 운동선수는 운동을 할 때 가장 보기 좋습니다. 다른 의미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에 의사인 거고, 선생은 학생을 가르칠 때만 선생일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의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며, 멋있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일 때 가장 빛나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 여러 생각을 담을 수 있고, 이것 저것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칭찬도 할 수 있지만 욕도 할 수 있고, 선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그런데 바울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죠. 그렇다면 성전일 때 우리는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성전의 역할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뜻이죠. 그 성전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여러분 각자의 생각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전이라서 성전으로 살아가며 성전의 모습일 때가 가장 멋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죠. 미래에 대한 고민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를 때 이 고민은 더 깊어지죠. 여기서 자주 접하는 말이 있죠. 그것은, '네가 가장 행복한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네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에는 우리의 정체성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고,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나를 창조하신 그분의 목적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죠. 나의 존재 이유, 내게 맡겨진 사명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재능이 아직 무엇인지 몰라도,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 역할이 아직 잘 모르겠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한 가지는 알게 되었죠. 그것은 내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성전으로서의 모습일 때 가장 빛나는 존재라고 말이죠. 그러니 내 안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요? 여러분은 성전에 어떤 것들이 채워지길 바라십니까? 좋은 생각, 착한 말, 이런 것들로 채우라는 말은 이제 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다른 것은 모르겠고, 성전은 잔잔한 평온이 흐른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안식과 연결된다는 점도 알겠어요. 그러니 나를 늘 평안 가운데 거하도록 인도하세요.

요 며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한국사람으로는 해서는 안 될 말처럼 느껴지는데요. 아시잖아요? 지금 중국 베이징에서는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데 황당한 경기 판정으로 우리의 정서가 들썩 거리는 것 말이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 피해자가 우리라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렇게 중국을 욕하고 분노하고 씩씩 거리다가 문득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이런 붉으락푸르락 분노의 감정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일까? 싶더라고요. 이 끝은 뭘까? 싶었어요. 그래서 중국사람들 싫어하면 그만일까? 그들과 상종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나중에 복수라도 해야 하나? 그게 무슨 유익일까?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있었는데요. 굳이 억울함을 풀고 싶다면, 굳이 보란 듯 이기고 싶다면 욕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보란 듯 아무렇지도 않게, 보란 듯 여유롭게 쪼잔한 승부의 승자가 아니라 진짜 실력의 승자처럼 너그럽고 평온하게 웃어주는 것이 멋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하찮은 일로 내 몸과 영혼에 쓸데없는 감정을 쌓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오히려 더 대범하고 담대함으로, 오히려 더 넓고 큰 마음으로 채울 거예요. 내 몸은 성전일 때 가장 빛나니까요. 그때 가장 멋지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큰 승리는 없을 거예요. 저는 그 길을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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