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21~24 노예일 때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런 것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이용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노예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때의 처지에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종교적, 혹은 율법적 차이에 대한 과거의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했죠. 오늘은 사회적 위치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엄연히 존재했죠. 사회적 계급이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종과 주인이 따로 있지 않았죠.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주인도 종도 똑같은 형제자매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주인의 발을 닦아주던 종이 예배 때에는 주인과 입을 맞추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회가 깨지 못한 신분적 차이를 교회가 깨뜨리는 혁명을 이룬 셈이죠.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전북 금산에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때 이 복음을 들은 조덕삼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는 그곳의 지주이자 유지였죠. 그는 자신의 사랑채를 내놓고 예배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금산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랑채만 내놓은 것이 아니었어요. 자신과 같은 양반뿐만 아니라 머슴들까지 교인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런 머슴 가운데는 이자익이라는 마부도 있었죠. 얼마나 서로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던지, 장로가 되는 과정에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추천이 되었고, 놀랍게도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에 자신의 종인 먼저 장로가 된 셈이죠. 이를 또 조덕삼은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자익이 신학공부를 하여 목사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죠. 그리고 금산교회에는 이자익 목사가 부임합니다. 참 놀라운 광경이죠. 한국교회가 이렇게 놀라운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혁명적인 신분 파괴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갈등했던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아무리 교회에서 형제자매가 되어도 결국 신분은 신분이었을 뿐이고, 현실은 노예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혁명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 중에는 급진적인 이들이 많죠. 아마 모든 평등과 공평의 가치를 실현하려면 하나님께서 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불태워 없애시고 새롭게 만드실 것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예수께 무력의 혁명을 원했던 이들처럼 말이죠. 또 이런 이들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평등과 공평을 말할수록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이들이죠. 태생적으로 저주받은 신분이라고, 남보다 못한 존재로 지금 살고 있다고 낙심하고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우리도 현재 그러니까요. 노예도 아니고, 종도 아닌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낮은 신분의 존재처럼,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처럼 나의 처지를 한탄하고, 내 상황을 비관하며 살기도 하죠.
비관까지는 안 하더라도 우리 속에 이런 마음은 여전하죠. '내 생활이 좀 더 나아지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좋아지면 힘이 날 것 같은데...' 늘 이런 식이죠. 교회에서도 그렇죠. 무언가 할 일이 주어지면, '내 신앙이 부족해서... 좀 성장하면 할게요...' '돈이 생기면 그때 남을 도울게요.' '건강해지면 일할게요' 뭔가 그럴싸하지만 결국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난 아직 부족하고, 난 아직 가난하고, 난 아직 힘들고... 그렇게 나의 현실은 별로라는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죠. 한 번도 내 오늘이 좋아본 적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내가 그렇게 바라는 '좀 좋아지면...' '좀 나아지면...' '좀 괜찮아지면...' 그런 때는 오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자리,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꽃을 피우지 않는다면 말이죠. 내가 그리도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저주하는 내 처지, 내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그의 피값으로 사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도우심도, 그분의 은혜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죠.
나의 삶을 바꾸는 방법, 나의 지경을 넓히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씨를 뿌리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 내가 있는 곳에서 꽃을 피우다 보면 나의 정원이 어느새 넓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우리가 그리도 바라던 '좋아지는 때'이고, '나아지는 때'일 거예요.
오늘을 회피해서는 내일은 없습니다. 내 자리를 부정하고는 새로운 자리도 없어요. 넓어지기를 원한다면 오늘 서 있는 자리를 다져야 합니다. 부르신 곳에서 예배를 시작해야 하고, 모든 상황 속에서 찬양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바라는 곳에 이르죠. 그렇게 오늘도 꽃을 피우세요. 지금 내 자리를 향기롭게 만드세요. 그 향기는 어느덧 내 발걸음보다 먼저 나의 지경을 넓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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