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1~3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결혼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친 바울은 이제 8장에서 우상숭배에 관한 질문에 대답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질문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우상에게 받쳤던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하는 질문이었죠. 이런 질문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우리에게도 제사라는 문제가 있죠. 제사 문제로 종교관의 다툼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 내 갈등도 생겨요. 어느 전통적인 종갓집 맏며느리가 한 해 수십 번에 이르는 제사에 지쳐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는 우스갯소리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죠. 절을 고사하고 그 제사에 올려진 음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도 우리를 주춤하게 만들죠. 이와 같은 질문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내면의 진실, 본질적인 가치의 문제보다 드러난 행동과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죄하는 문화가 만연하는 상황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기는 버겁습니다. 특별히 우상숭배 문제, 타 종교와의 관계, 동성애 문제들은 신학적인 문제를 떠나 정서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기에 더욱 어렵죠. 그래도 8장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주실 메시지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눌 용기가 생기기를 기대합니다. 그에 앞서 오늘은, 어떤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필요한 전이해라고나 할까요? 어떤 기준과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자신의 태도와 입장을 서술하고 있죠. 이것이 문제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바울은 지식과 사랑이 있다고 말하죠. 그리고 지식과 사랑을 대비시키며 말을 이어가죠. 이는 마치 지난주일 나눴던 빌립보서의 말씀과 연결되는 듯해요.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는 사랑에 대한 메시지였죠. 아마도 당시 어떤 사람들은 대단한 논리로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는 식으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지식은 반론을 할 수 없을 만큼 맞는 말이어서 사람들은 논리에 젖어들었던 모양입니다. 오직 절은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제사의 음식은 귀신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니 그것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귀신의 영이 붙는다고 했을까요? 아무튼 그렇게 맞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아마도 어떤 규정을 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떤 사정이나 처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정해진 규정에 반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모두 정죄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죠. 가령, 전통적인 가정에 며느리로 들어가 제사를 주관해야 하는 처지에 있거나, 혹은 도와주어야 하는 가정에서 제사 문제를 다루게 된 경우 등의 특별한 상황들이 있죠.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더했을 수도 있죠.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드렸던 제사를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저주하며 끊어낼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서나, 오해받는 입장에서 그런 극단적 태도변화는 쉽지 않았을 것이 뻔하죠. 그런데 그런 이들조차 이단이라 몰아세운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런 이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바울의 오늘 본문은 그들을 향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사람을 정죄하거나 공동체의 일치를 깨는 일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라는 뜻을 전하죠. 그에게 온전한 지식이란, 덕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며 사랑으로 시작하는 지식입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우시죠?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 그분의 말씀을 믿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또한 무엇입니까? 그분을 사랑해서 매일 교회를 지키고, 24시간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서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사랑하며 그분이 주신 삶의 기회들을 복되고 아름답게 살아내는 것, 그것 아닙니까?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지식을 사용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분의 용서와 은혜에서 우리는 타인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의 출발이어야 하죠.
예전에는 누군가 무엇을 물어보면 저는 아는 것을 말해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무엇이 옳은가? 에 초점을 맞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묻는 것은 나의 지식이 아니었더라고요. 묻는 자들은 자신을 봐달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들은 안 보고 내 안에 든 지식만 늘어놓았더라고요. 마치 이해해 달라고 묻는데 가르치려 드는 꼴이었죠. 요즘 말로 이를 꼰대라고 하죠.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입장, 그 사람의 처지와 아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중요해서 비록 피조물이고, 또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우리에게조차 함부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인간이 되셔서 오시기까지 하셨죠. 바로 내가 중요해서, 바로 나를 사랑하셔서, 바로 나를 이해하려고, 그는 고귀한 천상의 자리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아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더 큰 역사를 이룹니다. 지식보다 사랑이 더 큰 재능이고 능력입니다. 지도력은 지식보다 사랑에서 나오는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르죠. 내가 경험했던 많은 일들, 내가 가진 지식들, 소중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르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지식이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담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가르치지 마세요. 착각도 마시고요. 부드럽게 말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사랑이 되지는 않습니다. 강하게 말한다고 사랑이 가르치는 것이 되지도 않아요. 그러니 나이도 자랑 마시고, 경험도 자랑하지 마세요. 많이 배웠고, 많이 아는 것도 자랑하지 마세요. 오직 나에게 있는 사랑만 자랑하세요. 그것만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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