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8~13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제사에 쓰인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문제를 바울은 길게 설명하죠. 그의 결론은 간단하죠. '음식에 죄 없다'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죠. 음식의 문제를 좀 더 확장하면 미신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요. 제가 어릴 적에 무엇 때문인지 밤에 휘파람을 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러면 집에 뱀이 들어온다나요? 그 말을 어디선가 듣고는 휘파람을 불라치면 그 생각이 먼저 떠올라 머뭇거리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낭설이 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산에서 땅꾼들이 뱀을 잡을 때 휘파람을 불었던 것과 연관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습죠? 그게 뭐라고 휘파람을 못 부냐고요?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미신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가치를 부여하죠.
이외에도 많죠? 날을 잡는 일에도 관심이 많은 이들이 있어요. 무슨 날이니, 어떤 날이니 하는 것으로 날짜를 정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의외로 많더라고요. 이 날은 이래서 안 되고, 저 날은 저래서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것에 대해 미신임을 아는 이들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마치 그를 기정사실처럼 믿죠. 특별히 정치하는 이들, 많이 배우고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무속인들이 득세한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심지어 목사들조차 무속인 흉내를 내는 이들도 있죠.
최근 저는 말을 바꾸는 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어제 주일 설교 제목이 본래는 '당연함의 감옥에서 벗어나자'였습니다. 그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했다가 마지막에 제목을 바꿨어요. '참 다행입니다'로 말이죠. 이유는, 아무리 문제가 있고 고칠 것이 있더라도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것보다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죠. 그동안 문제점을 지적하고 아픈 곳을 건드려서 우리의 잘못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언어와 생각에 제가 익숙해요. 그런데 그것으로 저는 성장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픔을 묵상하고, 잘못을 묵상하는 것으로는 늘 그 자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생각부터 바꾸고 언어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죽음보다는 부활을, 죄보다는 의로움을 생각과 말의 표준으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안 된다, 저것은 안 된다의 사고에서 기쁘고 즐겁고 의로운 일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죠. 그때 우리의 걸림돌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실수? 다시 하면 되고, 잘못? 다시 잘하면 됩니다. 어떤 것도 좋은 의미를 부여하면 됩니다. 아픈 것도 다행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되죠.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 되죠.
바울은 그 사실을 음식에 대한 문제의 가장 기초적인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런 생각의 패턴을 따르는데 중요한 요소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자유하고, 내가 괜찮고, 내가 생각을 바꿨다고 해도 우리가 그런 생각과 행동을 유지하는 데는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는 사실이죠. 그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아직 어린 생각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무조건 음식은 괜찮으니 먹으라고 말해서 안 된다는 말을 하죠. 무조건 이것이 옳으니 따르라고 강압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시기에 마음대로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옳고 그름을 위해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하신 방법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방법이었어요. 거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존재합니다. 옳고 그름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진리보다 생명이 하나님께서는 더 중요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준을 바꾸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하나님이셨어요. 그래서 어떤 주장을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더 소중하고 귀합니다. 내가 어떤 주장을 전하는 것보다 그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그 사랑이 진실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많은 지식과 경험을 드러낼 기회가 있겠죠? 내가 아는 진리와 사실들을 말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어느 때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다툼이 될 때도 있을 겁니다.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종교관의 문제, 혹은 신념의 문제들로 첨예한 대립을 할 때도 있겠죠.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배우기는 신념과 신앙의 문제에는 물러서지 않는 법을 배웠죠. 마치 그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처럼, 복음을 수호하는 것처럼 배웠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나의 주장을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는 사랑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강한 권세는 우리의 강력한 주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은혜는 우리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그 순간, 우리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그분의 강한 메시지가 울려 퍼지죠. 그렇게 우리는 주장이 아닌 사랑으로 오늘도 그리스도의 메신저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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