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19~23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의 격언서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오죠.
'물고기를 주어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
영어 속담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요.
"YOU CAN LEAD A HORSE TO WATER, BUT YOU CAN'T MAKE IT DRINK."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발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죠. 자녀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학습법이 있습니다.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이죠.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이죠.
우리의 행동에는 크게 2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인가? 아니면 억지로 하는 행동인가? 뭐든지 내가 결정해서 하는 듯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결정보다는 남의 결정에 따른 행동을 할 때가 의외로 많죠. 사회적인 질서에 의한 행동, 시스템이나 기계적인 규율에 따른 행동들에는 대부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강요적 행동일 때가 많죠.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할 텐데요. 출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면 깊은 곳에 이르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혹은 먹고살아야 한다는 외부의 동기가 작용할 때가 있죠. 그런 외부적 동기에는 억지로라는 말이 붙기 마련입니다.
자기 주도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자신을 돕는 것입니다. 가끔 부모들 가운데 자녀를 심하게 돕는 이들이 있어요. 가령,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다고 해 보자고요. 아이가 넘어지면 냉큼 달려가 일으켜 세워줍니다. 그게 마치 아이를 돕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넘어질 때마다 아이는 부모를 쳐다보죠. 말이 늦는 아이도 있습니다. 관찰을 해 보면 부모가 먼저 말을 다 해 주는 경우들이 있어요.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 전에 그 감정을 다 정해 주는 거죠. '우리 아기 아팠어요? ㅉㅉ' '기분이 나빴어?' 등등 아이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대신 말해 주는 경우죠.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생각할 동기, 자기가 말할 이유를 잃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 떨어지는 것이죠.
자기의 결정력이 떨어지는 것은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죠. 자존감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결정을 남에게 미루기 쉬워요. 남이 결정해 주는 삶, 그래서 내가 결정할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남이 결정해주는 대로 따라가는 삶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죠. 여기에 핑계가 자리합니다.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만큼 책임감도 떨어지죠. 그래서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 거죠.
'엄마가 하라고 했잖아!' '그게 내가 하고 싶어 한 줄 알아?'
스스로 하고자 하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본 어게인, 즉 중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내 삶의 결정의 동기를 정하는 문제라고 말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필요하고, 그분의 생각이 중요하고, 그 뜻을 찾는 것을 동기로 삼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죠. 그 동기가 인생을 바꾸고 목표도 바꾸며 가치관을 세우는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발적이어야 하죠.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신앙을 자발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억지로 믿고 억지로 따르는 일들이 있죠. 어떤 두려움과 강요에 의한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에요. 그것을 저는 미신이라고 부르죠.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자발적인 참여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결정, 우리 스스로의 참여를 기다리시죠.
시편 기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편 51:12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자발적인 마음입니다. 바울이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놓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의 자발적인 동기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태클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남에 의해서도, 타인의 시선 때문도 아닌, 어떤 목적이나 수단으로 가 아닌, 오로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결단과 동기 때문이죠. 이 자발적인 마음, 자원하는 심령이 나의 길을 견고하게 합니다. 내가 스스로 걷는 길이어야 돌파할 수 있어요. 우리의 힘은 이 자원하는 심령에서 나옵니다.
오늘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많은 일들이 있겠죠? 그러나 오늘 하루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 이들입니다. 그런 자원하는 심령으로 오늘을 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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