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1~6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닷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를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조상들이 악을 좋아한 것과 같이 우리가 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규율과 전통에 자신을 가두며 남을 비판하기에 급급한 이들을 향해 자유를 외치고, 그럼에도 자발적인 절제를 통해 자유를 망종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깨어있음이라고 말한 바울은, 이제 10장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접근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며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죠.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선택받았으나 정작 자신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역할은 했지만 정작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 아이러니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이 있죠.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유명하기는 한데 어떤 맥락에서 이 말씀이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을 못 하는 분들이 많죠. 이 말씀은 부자 청년 이야기의 끝자락에 등장합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 다 아시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해 물었고,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죠. 그 모든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말하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가진 소유를 팔아 나누라고 말씀하죠. 이에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말씀도 하시죠. 그런데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요. 더 정확히는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나는 무엇을 받을까?"가 그의 질문이었죠.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때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좀 어렵죠? 그런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이 있었어요.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보상심리라고 할까요? 내가 먼저니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이고, 내가 우선이니 더 좋은 자리가 내 것이라는 심리는 우월주의와 특권의식을 동반하는 율법주의로 변질되기 쉽죠. 마치 기독교인이면 타 종교인보다 뭔가 더 나을 것 같고, 더 사랑받고 더 좋은 일이 더 많이 벌어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거죠. 여기서 연결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다음 장에 이어지는 포도원 품꾼(마 20)들의 이야기죠. 새벽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 늦게부터 일한 사람에 대해 포도원 주인은 똑같은 품삯을 주죠. 이에 더 많이, 아니 더 먼저 와서 일하는 품꾼의 불만이 제기됩니다. 사실 그렇죠. 더 많이 일했는데, 더 먼저 왔는데 주어지는 것은 똑같다는 자체가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민족임에도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했던 이유, 그것은 뭘까요? 그것은 악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그 악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그들은 악한 것을 따랐을까요? 그 유혹에 왜 빠졌을까요? 이 질문의 해답은 악한 것이 무엇이냐? 에 있지 않아요. 오직 받은 은혜를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눈앞에서 강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바위틈에서 터져 나온 물을 마시는 기적과 같은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불만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정의감에서 그 불만이 나왔을까요? 그게 공정의 문제일까요? 오히려 그 출발점은, 일이 없어 하루를 굶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를 일꾼으로 삼아준 그 주인의 은혜를 반나절만에 새까맣게 잊어버린 탓은 아닐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죠. 누가 한 말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말의 의미는 정확한 것 같아요.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출발이 없이는 그 앞길의 성장은 없다는 의미겠죠. 이 말을 오늘 본문의 의미로 재해석하면 이러지 않을까요? 받은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새로운 은혜는 없다고 말이죠.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를 잊으면 주어질 감사도 없다고 말입니다. 본래 내 것은 없었어요. 다 받은 은혜로, 사랑으로, 도우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 나눠도 되지 않을까요? 그분의 도우심이 계속된다면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움켜 잡는 이유는 주실 것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주신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 새로운 기적, 새로운 축복은 이미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데서 나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 믿음이 나와요. 내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데서 축복이 열립니다. 그러니 받은 은혜를 꼭 기억하세요.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열어주신 은혜, 이 자리에 있게 하신 은혜, 소중한 관계들을 맺어주신 은혜, 그 은혜를 잊지 마세요. 악연도 은혜로 받으면 인연이 되고, 비극도 감사하면 희극으로 변화됨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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