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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49 - 할 수 있을 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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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9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맙시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였고, 뱀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민수기 25장의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민수기 21장의 이야기를 바울을 꺼냅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문제, 음행의 문제에 이어 불신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민수기 21장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죠? 민수기 21장은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을 거쳐 가나안에 거의 다 온 상태죠. 그들은 가나안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지도로 보시면 편하실 것 같아서 간단히 그렸습니다. 보시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정말 우여곡절 끝에 가데스바네아에 도착을 했습니다. 정말 가나안이 코앞인 거죠. 지도에 파란색 선이 보이시나요? 이 선은 왕의 대로라고 불리는 길로, 가나안까지 가는 최적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에돔이라는 나라를 관통하는 길이었어요. 그래서 모세는 에돔의 왕에게 정중히 그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죠. 그런데 그만 에돔 왕이 그 요청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막겠다고 하죠. 그도 그럴 것이 한 나라의 인구가 자신의 땅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렇게 땅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모세는 하는 수 없이 길을 우회해서 가죠. 그것이 빨간색으로 표시된 길입니다. 에돔 땅을 돌아서 가는 거죠. 생각해보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고초를 겪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불만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차라리 전쟁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모세는 에돔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돔과 다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죠. 에돔은 이스라엘에게는 형제와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형제가 있었죠? 바로 에서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혈통을 가진 민족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런 배경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불만은 극심했습니다. 이 불만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여겨졌어요. 

 

원망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원망이라는 것이 불만이 생겨 이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부정하는 데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투덜거리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일들을 하찮은 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성스러운 양식이라고 여겼던 만나를 하찮고 맛없는 음식이라고 비하하기 시작했고, 이제 지겹기까지 하다고 말하죠. 이는 마치 부모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죠.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 뭘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 결국에는 부모를 굴복시키겠다는 의지로 오만가지 이야기를 뱉어내는 아이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님을 시험했죠. 이 때문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물게 했고, 다시 구리뱀을 보게 하셔서 살게 하시는 일이 민수기 21장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리스도의 자유를 이야기하자 그들은 그 자유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교도의 모임에도 참여하고 갖가지 자유를 누리며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죠. 그러나 그 자유는 어디까지나 뿌리를 깊이 내린 이들의 자유입니다. 내 뿌리가 썩도록 만드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죠. 그런데 고린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이 흔들리고 뿌리가 뽑히는지도 모른 체 자유라는 허울로 온갖 방종으로 거듭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거죠.

 

우리에게는 게임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울 자유도 있죠. 밥을 먹지 않을 자유도 있고, 직장에 출근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려면 게임으로 내 삶이 흔들리고, 불면으로 건강이 깨지지 않아야 하죠. 오히려 우리의 취미생활은 우리 삶에 활력이 되어야 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깨지고 상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우리가 그 선을 지킬 수 있도록 영성을 주셨습니다. 온전한 영성은 내가 얼마나 디뎌야 하는지, 내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아는 자유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겁이 존재하는 것과 같죠. 좋은 두려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하는 두려움이죠. 그래서 자유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습니다. 

 

내가 예배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사람들과 만나지 않아도, 말씀을 나누지 않아도, 영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내 감정을 감사와 기쁨으로 만들지 않아도, 다 괜찮겠지? 이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밥을 거부하는 아이에게 언젠간 강제적으로라도 먹이고 영양분을 공급하는 부모이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지 모릅니다. 그날이 꼭 행복하지 만은 않을 거예요. 상한 몸을 다시 회복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니까요. 

 

건강은 아무 일 없을 때 지키는 겁니다. 내 기분은 편안할 때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선을 지키세요. 가능할 때 해야 할 일을 다 하세요. 안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은 버리세요. 정말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할 수 있을 때 하세요. 할 수 있을 때 기도하시고요. 할 수 있을 때 묵상하세요. 그것만이 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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