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8 간음하지 맙시다. 그들 가운데 얼마가 간음을 하였고,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쓰러져 죽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기록들을 바울은 계속 풀어놓습니다. 우상숭배에 이어 음행에 대한 문제를 오늘 제기하죠.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의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하나씩 끊어 짧게 묵상할 텐데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상세히 묵상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잘 기억해 두고자 하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묵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우리가 지난 잘못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주신 은혜를 잘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구원받은 은혜가 있을 때만 의미 있습니다. 죄가 죄로만 남으면 그것은 그저 죄의 구렁텅이일 뿐이에요. 나의 회개가 죄의 묵상으로만 끝나면 회개가 아니듯이 말이죠. 죄를 덮으시고 그 위에 구원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나의 죄를 떠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지나간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고, 은혜를 다가올 시간에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과거의 한 사건을 언급하죠. 하루에 24,000명이 죽는 사건은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요.
민수기 25:9 그러나 그 염병으로 이미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 명이었다.
이 끔찍한 사건의 발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와중에 모압인들의 꾐에 빠져 그들의 신 바알브올을 숭배하는 예식에 참석한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제사에 참석한 것만이 아니라 그 신전의 창녀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일까지 했던 것이죠. 당시 이방 신전에는 신전을 지키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사에 참석하는 이들과 음행을 하는 일을 맡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음행이 제사의 일부분이었던 것이죠. 지금 바울이 이 서신을 보내는 고린도에도 그런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프로디테라는 신전인데 그곳에도 똑같은 일들이 성행하고 있었죠. 아마도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그런 제사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이게 보수적으로 접근하면 고리타분한 꼰대가 되고, 조금 개방적으로 접근하면 무슨 자유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참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에요. 요즘의 성적인 인식들은 제가 자란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그럼에도 바울은 성적인 타락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그의 단호함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저 육체적인 관계의 문제로 음행을 치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성적인 교제가 영적인 교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전에서 그와 같은 이들이 벌어진 이유는, 그것이 신과의 교류, 혹은 영적인 묶임을 가져오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묶인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감옥에 갇히듯이 말입니다. 자유롭지 못하고 사슬에 매인 것 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죠.
누구에겐가 뇌물을 받거나 신세를 지었다면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죠. 눈치를 보거나 혹은 편애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편가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영이 그 문제, 그 사람에게 묶여있는, 갇혀있는 문제라면 단순한 것이 아니죠. 영적인 간음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내가 그 생각에 묶여 있는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면 나는 그 두려워하는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 착각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죠.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일까요? 내가 사슬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영적인 간음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 미워 보입니다. 그러면 미운 것만 눈에 들어오죠. 왜 이쁜 짓은 보이지 않을까요? 세상에 100% 미운 짓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이쁜 짓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왜죠? 내가 영적으로 미움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도 많아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 일쑤죠. 이미 끝났다고 결정해 버리죠. 계속 말씀드리는데요. 걱정이 딱 그렇습니다. 이미 안 될 것을 대비하는 듯 보여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그들에게 그런 걱정과 염려가 떨쳐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이 올무라면 어떨까요? 내가 그 올무에 묶여 있고, 그 감옥에 갇힌 것이라면요? 그렇게 내가 영적인 간음에 빠져 있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사랑에는 마음을 주어도 쾌락에는 몸을 주지 마세요. 감사와 은혜에는 묶여도 염려와 걱정에는 묶이지 마세요. 기쁨과 즐거움의 자발적인 신앙에는 묶여도 강요와 강압, 두려움에 묶인 신앙생활은 하지 마세요.
오늘도 내 발목을 잡고, 내 마음을 묶는 것은 기대와 감사이길 빕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웃을 일만 보이고, 축복할 일만 일어나길 소망해요. 그렇게 간음이 아니라 사랑을 하세요. 감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되는 사랑을 하세요. 올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날개가 되는 사랑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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