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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31 - 좀 더 큰 물에서 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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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12~16   그 밖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요, 주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 여자가 남편과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여자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가 아내와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져도 됩니다. 믿는 형제나 자매가 이런 일에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아내 된 이여, 그대가 혹시나 그대의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남편 된 이여, 그대가 혹시나 그대의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바울의 구체적인 결혼관에 대한 가르침들이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오늘 말씀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남편과 아내로 사는데 아내가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말하죠. 반대로의 경우로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죠.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말이죠. 아마도 부부로 살았는데 어느 날 한쪽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마찰이 생겼을 수도 있겠죠. 종교관이 맞지 않으면 참 같이 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갈라서는 경우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좀 순수한 생각이고요. 이보다는 어떤 종교적인 우월성으로 인한 갈등들이 생긴 경우가 훨씬 많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가령, 오늘 말씀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한다면 헤어져도 된다는 말씀이 있죠. 이게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종교관을 가졌다고 해도 헤어지지 말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져도 된다니 이건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것도 오늘 말씀의 한 단서가 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신앙으로 인한 이혼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우월성에 의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보여주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인 가족을 멸시했던 것으로 보여요. 마치 자신은 거룩한데 믿지 않는 가족은 불결한 것처럼, 뭘 모르는 사람처럼, 심지어는 죄인처럼 여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게 억측처럼 보이시나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우리는 타 종교인, 혹은 불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죠. 그리스도 종교관이 투철하면 투철할수록 나와 다른 종교관의 사람들을 터부 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안 만나려고 하고, 그들과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무슨 못 갈 곳을 간 것처럼 여기는 경우도 허다하죠. 말은 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은 다분합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경우들이 생겼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요즘은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좋아졌을까요? 그래도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뭘까요? 혹시 내 자녀가 믿지 않는 형제나 자매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흔쾌히 축복하고 인정하실까요? 아니면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드실까요? 어떤 경우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부정적인 견해들을 드러내거나 어쩜 대놓고 반대를 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부모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종교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이런 마음의 중심에는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래에 벌어질 소망이 없다는 점이에요.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이런 말을 하죠. '내가 혹시 남편을, 아내를 구원할지 어찌 알겠는가?' 이런 말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죠. 이런 믿음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 근거도 바울은 명시하죠. 바로, "믿지 않는 자는 믿는 자로 인해 거룩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근거죠.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정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사실을 믿고 계신가요?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런데 왜 어둠 속에 서기를 두려워하시나요? 고생할까 봐서요? 고생하죠. 그런데 단순히 고생할까 봐서가 아니라 그 어둠에 내 자식의 빛이 꺾일까 봐는 아닌가요? 애초부터 정의가 불의를, 하나님의 복음이 불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는 왜 내 신앙이 이미 꺾일 것을 상정하며 살까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선포입니까? 아니면 '아이고 오늘도 어떻게 사나~'라는 탄식입니까? 왜 나는 이미 질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내 믿음으로는 안 되고, 내 신앙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나에게 먼저 있을까요? 왜 나는 더 단단해지고, 더 자랄 것을 믿지 못할까요? 내 지갑이 커야 더 많은 돈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내 상상력이 커야 더 많은 생각을 담을 수 있고요. 내 신앙의 선포, 믿음의 분량이 커야 하나님의 도우심도 커집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는 이유는,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뭐든 주어진 것을 하겠다는 도전을 할 때, 주님께서 도우시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미 지고 시작하는 게임은 하지 마세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 운명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나의 인생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에요. 문제는 언제나 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자들입니다. 이웃을 거룩하게 물들이는 힘을 가진 이들이죠. 그저 자신의 것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뿌리고 물 주고 열매를 맺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를 치는 이들이 아니라 울타리를 걷어 내는 자들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울타리를 치려고 해요.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하죠. 그렇게 지키려는 자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운동경기의 명언이 있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라고요. 

 

더 큰 물에서 노세요. 내가 큰 물에 나가면 하나님도 크게 도우십니다. 내가 더 넓은 곳에 이르면 그곳에 맞게 일하시죠. 더 많은 일을 하면 그 많을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더 많이 나누면 그 나눔이 그치지 않도록 많은 것을 부어주시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축복의 방법입니다. 고인물에 물을 부으시는 일은 없습니다. 썩기 때문이죠. 항상 더 넓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더 큰 곳으로 갈 때마다 그곳을 채우시고 도우시는 방법이 그분의 스타일이세요. 그러니 믿으세요. 할 수 있을까? 싶은 곳으로 가세요. 가보면 또 별 것도 아닙니다. 하면 또 돼요. 왜 그리 두려워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죠. 그런 생각은 깊은 곳으로 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시작해 보시죠. 아무 일 없이, 무사히 하루를 보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좀 사건이 벌어지고 힘든 일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시작해 보시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신가요? 운동을 해도 가끔 테스트하고 싶으시잖아요? 내가 얼마나 튼튼한 근육을 갖게 되었는지, 체력은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알려면 한번 써 봐야죠. 내가 아침 묵상을 매일 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아멘으로 화답했는데, 그런 믿음이 얼마나 튼튼한지 실험해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럼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큰 물에서 놀아보시죠. 나에게 태클 거는 사람도 좀 있고, 상처도 좀 생기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도 벌어지고 하면 좋겠어요. 그때 예전과 다른 나의 반응과 모습을 보며 성장한 나로 인해 기쁨이 가득한 하루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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