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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88 - 내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바로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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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4:28~33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두 해를 지냈는데도, 왕의 얼굴을 한 번도 뵙지 못하였다. 압살롬이 요압을 왕에게 보내 보려고 요압에게 사람을 보냈으나, 요압은 압살롬을 방문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다시 사람을 보냈으나, 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러자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을 불러다가 지시하였다. "내 밭 곁에 요압의 밭이 있다. 그가 거기에 보리농사를 지어 놓았으니, 너희는 가서, 그 밭에다가 불을 질러라." 그래서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요압이 압살롬의 집으로 찾아가서 따졌다. "어찌하여 종들을 시켜, 나의 밭에다가 불을 질렀습니까?"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였다. "이것 보시오. 나는 이미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좀 와 달라고 부탁을 하였소. 장군을 임금님께 보내어서, 나를 왜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였는지, 여쭈어 보고 싶었소. 여기에서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그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더욱 좋을 뻔하였소. 이제 나는 임금님의 얼굴을 뵙고 싶소. 나에게 아직도 무슨 죄가 남아 있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더라고 말씀을 드려 주시오." 그래서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서, 이 일을 상세히 아뢰니, 왕이 압살롬을 불렀다. 압살롬이 왕에게 나아가서, 왕 앞에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자, 왕이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 시간 함께하는 아침묵상은 삶의 적용을 위한 묵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황이나 행동, 혹은 태도들을 통해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죠. 그 속마음 속에 바로 나의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압살롬의 일화 하나가 등장하죠.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일화이지만 이 속에서 압살롬의 삶의 태도를 볼 수 있고 또한 우리에게도 자리 잡고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건은 간단합니다. 압살롬이 이스라엘로 돌아온 지 2년이 넘었습니다. 망명생활까지 하면 5년이 넘은 기간이죠. 그 기간 동안 그는 자신도 원치 않은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답답했겠죠? 그는 자신을 돌아오도록 도와준 요압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대꾸도 하지 않죠. 이미 다윗의 환심을 샀기 때문일까요? 압살롬을 통해 얻을 이익이 없었을까요? 아무튼 요압은 꿈쩍도 하지 않죠. 그랬더니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화풀이라고 여겨지기보다 더 깊은 계략이 있었는데요. 사람은 자신의 소유가 축나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법이죠. 그렇게 하면 요압이 화가 나서라도 찾아올 것을 미리 안 것입니다. 압살롬은 그런 계략이 참 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생각대로 요압은 압살롬을 찾아와 따졌습니다. 그때 압살롬은 요압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죠. 그리고 그 요청은 이루어집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말하고 다윗이 압살롬을 부르죠. 여기서도 다윗의 단면이 드러나죠? 이미 묵상한 바와 같이 다윗은 또 요압의 요청에 마지못한 듯 들어줍니다. 아마도 자신 또한 압살롬을 보고 싶었을 거예요. 이미 삼하 13:39에, 다윗이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적어 놓은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2년 동안 보지 못했죠.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만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남들 눈을 의식해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청하자 마지못해 응하는 모양새를 취하죠. 여기서 다윗의 연약함을 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이미 묵상을 나눴으니 접어두고요. 오늘은 압살롬에게 집중해 보죠. 압살롬의 계략이 어떤 작전 같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계략은 적중했죠. 어쩌면 타고난 전략가의 기질이 보이기도 합니다. 예측력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눈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런 전략의 기초, 그의 똑똑함의 시작이 어떤 것인지 보이시나요? 그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2년간의 가택연금이 답답하다고 느끼고 있죠. 망명생활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했을까요? 빨리 이 상황이 풀리기를 바라고 있죠. 그것이 자신의 계략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왜 그가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까? 왜 그가 2년 동안이나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죠? 그게 다 자신의 엄청난 죄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는 없습니다. 돌이킬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 뿐입니다. 내가 당한 것은 억울하고 내가 남을 죽인 일은 기억도 못하는 꼴이죠. 이는 오늘 에피소드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가 억울한 것을 풀기 위해서 남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새입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삶의 태도죠.

 

그런데 이게 압살롬에만 해당한 것일까요? 나에게는 없을까요?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너무도 잘 알아요. 그런데 남이 불편한 것은 전혀 모르죠. 내가 당한 일, 내가 당한 억울함과 불편은 너무도 쉽게 느끼는데 내가 남에게 주는 불편, 잘못, 실수는 못 느끼는 것이 바로 납니다. 내 억울함은 조금도 못 참지만 남의 억울함은 못 느끼죠. 아니 나의 정당함을 위해서는 남의 밭쯤은 그냥 불태워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우리의 심리입니다. 내로남불이라고 하나요? 나는 괜찮고 남은 안 되는 심리가 우리 속에 가득합니다. 그러니 내가 조금만 불편하면 불평에, 원망에, 짜증을 더해서 나만 억울하고 나만 당하는 것 같고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저지른 실수와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죠.

 

불평 이전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억울함 이전에 자신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면... 얽히고설킨 삶의 실타래를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풀어낸다면 말이죠. 내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회개로부터 시작하고, 타인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데로 나아가죠. 내 문제만 소중하지 않습니다. 남의 문제도 소중하고요. 내 자식만 자식이 아니에요. 남의 자식도 귀합니다. 내 문제를 위해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내 문제를 안고 남의 문제에도 귀를 기울일 때 어느덧 내 문제의 실타래가 풀리죠. 이것이 이웃사랑의 신비입니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내가 억울하면 남도 억울한 법입니다. 남을 위로하면 나도 위로받고 남에게 베풀면 나도 은혜를 받아요. 이것이 믿음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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