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4:1~3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 것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알았다. 요압이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슬기로운 여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였다. "그대는 초상당한 여인처럼 행동하시오.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이미 오랫동안, 죽은 사람을 애도한 여인처럼 꾸민 다음에,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호소하시오." 요압은 그 여인에게, 할 말을 일러주었다.
암논이 다말에게 몹쓸 짓을 했을 때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할 때도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랏일을 다스리는 데는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왕으로서 재판을 할 때에도 명석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던 다윗인지라 그런 그의 행동이 낯설기만 하죠. 나이가 들어서 그의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그런 석연치 않음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요압이 등장합니다. 어떤 모사에 얽힌 이야기에 주로 요압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를 보고 싶지만 살인자가 되어 버린 그를 곁에 두기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작전을 꾸미죠. 남의 재판을 가장한 다윗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흡사 나단 선지자의 고언과 닮았습니다. 그도 전혀 다른 예를 다윗에게 고하며 다윗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방식을 취한 바 있죠. 요압 또한 그런 모습을 흉내 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그는 한 여인을 시켜 연기를 하도록 하죠.
그 연기의 내용이나 결과는 다음 묵상에서 다루기로 하고요. 지금 중요한 것은 요압 또한 다윗의 판단력을 일깨우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의 판단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어쩌면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력을 아직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은 비록 연기하는 여인의 모습이지만 그 일에 무척 침착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느끼는 점이 바로 이것인데요. 다윗은 신체나 혹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그의 판단력은 살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암논에게는 안 그랬을까요? 왜 압살롬에게는요? 혹시 그것이 자신의 자식이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남의 일에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지만 자신에게는 주관적인 판단을 할 때가 있죠. 특별히 자식의 일에는 간혹 이성이 마비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남의 일에는 엄격하고 나의 일에는 관대하다는 측면만의 일은 아닙니다. 반대로 남의 일에는 관대하고 나의 일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도 있죠.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일정한 판단력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죠. 간혹 남에게는 엄격하고 나에게는 관대한 것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내로남불이라 부르며 힐난하죠. 그러면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것이 좋을까요? 남에게는 무한 사랑을 주면서 나에게는 냉철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맞을까요? 소위 심각한(?) 크리스천들을 보면 그런 부분들이 많아요. 남에게는 늘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합니다. 있는 것을 다 퍼주죠.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가정에는 늘 냉정합니다. 교회에서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장로님인데 집에서는 늘 차갑고 냉정한 아버지로 있는 분들이 있죠.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착한 아이 콤플렉스일 뿐이죠. 왜냐하면 모든 판단 기준은 일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그의 판단은 일정하십니다. 모든 생명이 다 똑같죠.
한 번은 제가 자신을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묵상을 나눈 적이 있는데 어떤 분이 댓글을 남기셨더라고요. 성경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없다고요.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만 있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갖는 인식인지도 몰라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데 나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 사랑이 가능할까요? 자신을 버리면서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치 없어서가 아닙니다. 너무도 소중하고 너무도 사랑하지만 내어놓는 것이죠.
자신의 일에는 침묵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남에게는 가르치기 좋아하면서 자식에게는 아무 말 안 하죠. 반대로 남에게는 그리도 너그러우면서 자식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판단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을 구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모순이 나오고 잘못된 결정들이 나오죠. 남에게 관대하다면 나에게도 관대하고, 남을 사랑한다면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반대로 남에게 세운 기준은 나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고, 남에게 필요한 말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임을 명심해야죠. 그렇게 나와 남을 차별하지 않는 기준이 나의 판단력을 옳게 만듭니다.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죠.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소중한 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도 소중합니다. 나도 하나님께 소중한 자녀이듯 남도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이웃사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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