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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82 - 죄에는 뻔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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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3:21~22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몹시 분개하였다. 압살롬은 암논이 누이 다말에게 욕을 보인 일로 그가 미웠으므로, 암논에게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암논의 중대 범죄에 대한 전말이 다말의 아비 다윗과 오라비 압살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에 대한 압살롬의 반응을 어제 묵상했죠. 오늘은 다윗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렇습니다. 이 일에 대한 심각성을 다윗은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분개를 했을 거예요. 게다가 암논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던 모양이죠. 그를 미워했다는 것이 근거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식, 혹은 가까운 가족에 대해 기대했던 바와 다른 일들이 생기는 경우 그 실망감에 미워하거나 상종을 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이런 태도가 정당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다윗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만 끝내고 말 위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입니다. 나라의 질서와 중재를 책임져야 할 위치죠. 적게는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가정에서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할 뿐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잘못에 대한 징계도, 아픔을 겪은 자녀에 대한 위로도 그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번역본 가운데 70인 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 판본 가운데는 가장 오래되고 권위를 인정받는 번역본인데요. 이 책에 오늘 본문에 대한 추가 설명이 첨가되어 있는데, 다윗이 장자인 암논을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 암논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당시 번역자들의 의견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다윗은 암논을 꾸짖고 가르쳐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진짜 사랑은 말하고 알리고 가르치고 인도해 가는 적극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죠. 다윗이 침묵했던 이유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사랑이나 장자에 대한 권리로서 다윗이 침묵했다고 보기보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 암논의 행동이 다윗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을 위계 혹은 위력에 의해 범한 사실은 다윗이나 암논이 똑같기 때문이죠. 또한 남의 아내라는 사실이나 근친이라는 사실도 넘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데서 똑같습니다. 어쩌면 완전 범죄를 노리고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던 있어서는 안 될 일 또한 다말을 범하고는 마치 방귀 뀐 놈이 성내듯 다말을 내쫓는 허무맹랑한 짓과 너무 닮았죠. 어쩌면 다윗은 암논 사건을 들었을 때 자신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율법으로 다스리면 사형감이었던 자신이었기에 역시 사형감인 죄를 지은 암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죄에는 잔상이 있습니다. 떨쳐 버리지 못하는 어떤 찌꺼기가 남죠. 다윗은 회개했고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비록 대가를 지불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더 이상 죄의 값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용서는 잊는 것이죠. 그렇게 회개는 새로운 길로 나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암논 사건을 마주하며 자신의 죄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에게 죄의 잔상이 남아있다는 뜻이죠. 게다가 공정한 법 집행까지 가로막을 정도였다면 그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하죠. 많은 이들이 죄책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죄책감을 갖고 사는 것이 착한 일처럼 받아들여요. 자신의 죄를 계속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마치 선한 일처럼 받아들이죠. 그런데 그것은 죄의 속성과 힘을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죄는 묵상할수록 커진다고 말씀드린 바 있죠. 죄는 생각할수록 우리를 수렁에 빠뜨립니다. 그 죄는 마치 무서운 상대를 만나면 모든 감각이 얼어붙듯이 우리의 이성과 감성, 특별히 지금껏 가꾸고 보듬았던 영성까지 마비를 시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해방입니다. 용서는 자유입니다. 이제 올무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일로 괴로워할 필요 없는 것이죠. 아직도 '너 예전에 그랬잖아~'라는 속삭임이 들린다면 그것은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이죠. 회개했다면 이제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듯, 다시 공의와 정의를 잣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뻔뻔하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뻔뻔합니다. 뻔뻔해야 주님의 길을 갈 수 있어요. 우리가 언제 옳았습니까? 잘했습니까? 언제나 용서와 사랑과 은혜로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반복되는 잘못 속에서도 늘 용서받고 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찌 뻔뻔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죄에는 뻔뻔해야 합니다.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거예요. 그렇게 뻔뻔해야 죄 앞에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뻔뻔해야 옛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못해요. 나는 새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어제의 기운으로 살지 마세요. 어제의 죄로도 살지 마시고, 어제의 은혜로도 살지 마세요. 오늘 새로운 시간, 새로운 은혜, 새로운 믿음으로 사세요. 어제의 죄가 나를 짓누르지 못하게 오늘 새로운 축복으로 사세요. 그렇게 뻔뻔하게 살 때 주님의 새로운 시간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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