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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78 - 내가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지금 좋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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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3:1~5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름다운 누이가 있는데, 이름은 다말이었다. 그런데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였다. 암논은 자기의 누이 다말을 사랑하였으나,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병이 나고 말았다.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다. 요나답은 아주 교활한 인물이었다. 마침 그가 암논에게 물었다. "왕자님, 나날이 이렇게 안색이 수척해지시는데, 웬일이십니까? 나에게 그 까닭을 알려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암논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내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자 요나답이 그에게 제안하였다. "왕자님은 침상에 누워서, 병이 든 체하십시오. 부왕께서 문병하러 오시면, 누이 다말을 보내 달라고 하십시오. 누이 다말이 와서 왕자님이 드실 음식을 요리하게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십시오. 다말이 왕자님 앞에서 음식을 요리하면, 왕자님이 그것을 보면서, 그의 손에서 직접 받아먹고 싶다고 말씀드리십시오."


기억하십니까? 뜬금없이 다윗의 자녀들에 대한 기록들이 사무엘하 초반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것 말입니다. 맥락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다윗의 족보가 몇 차례 등장했었죠. 그 기록은 약간의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며 우리에게 뭔가 사인을 주는 듯했습니다. 마치 많은 아내와 아들을 두는 그 자체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고가 실제화되는 것을 우리는 앞으로 보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죠.

 

말하기조차 낯부끄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이 두 사람입니다. 암논과 요나답인데요. 암논은 다윗의 첫 번째 아들로, 다윗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아히노암에게서 태어난 인물이죠. 요나답은 암논과 사촌지간입니다.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죠. 암논은 지금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죠.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에게는 누이동생인 다말이었습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은 익숙한 이름인데요.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로 더 유명한 인물이죠. 그와는 동명이인입니다.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아버지가 같은 다말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경악스러우나 당시에는 이들의 결혼도 용인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에 대한 근거는 오늘 본문 이후에 등장하는 다말의 말에서 나타나죠. 겁탈을 하려는 암논에게 차라리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 정식 결혼을 하자고 제안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뭔가 찜찜한 스토리의 전개에서 요나답이 등장합니다. 암논은 마음으로 욕정을 품었죠. 그런데 요나답이 나타나 그 욕정을 현실화합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아래서 그 열매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는 한 사람과 그 옆에서 부추기는 또 다른 존재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왕궁의 옥상에서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에 눈이 돌아갔던 다윗의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죠. 한 마음이 들어가자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한 다른 합리적인 생각들이 그를 감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는 언제나 그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은 마치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상어 떼처럼 수많은 합리화라는 조언자들이 달라붙습니다. 그 조언자들은 우리 안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찜찜함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묘수를 부리죠.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생각을 품지 마세요. 일어나기도 전에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 생각들은 단순해 보여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수많은 불안과 걱정들이 몰려와 우리를 한 길로 이끕니다. 이러면 어쩌나? 저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단순한 걱정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생각으로 우리는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죠. 신기하리만큼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납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진리인양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걱정과 염려는 미래를 준비하는 동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미래를 왜곡하고 방해하는 첨병입니다. 우리가 앞날의 일을 잘 준비하려면 소망이 필요합니다.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진부하게 여기는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그런데 진짜 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걱정이나 염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소망이에요.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어줍니까?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늘이 도와줍니까? 기쁨과 희망, 감사와 소망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걱정과 염려, 불법과 불의 속에는 말 많고 탈 많은 조언자들 뿐이에요. 좋은 생각을 하세요. 좋은 눈을 가지세요. 내가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지금 좋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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