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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79 - 내가 변하는만큼 내 자녀도 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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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3:15~19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다말이 암논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나를 쫓아내시면, 이 악은 방금 나에게 저지른 악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의 시중을 드는 하인을 불러다가 명령하였다. "어서 이 여자를 내 앞에서 내쫓고, 대문을 닫고서 빗장을 질러라." 암논의 하인은 공주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대문을 닫고서, 빗장을 질렀다. 그때에 다말은 소매에 색동으로 수를 놓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공주들은 시집가기 전에는 옷을 그렇게 입었다. 이제 다말은 머리에 재를 끼얹고, 입고 있는 색동 소매 긴 옷도 찢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목을 놓아 울면서 떠나갔다.


암논은 기어코 다말을 욕보입니다. 다말의 눈물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죄에 사로잡히면 뵈는 게 없는 법이죠. 불법도 정당한 것이 되고, 불의도 다 합리화가 됩니다. 특별히 성경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처참하게 굴복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암논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게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갖고 보는 호기심이죠. 어제 묵상에서 다말을 취하고 싶어서 몸져누운 암논을 저는 상사병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번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사병이 아니라 탐욕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사병은 그래도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이라도 있죠. 그런데 암논은 다말에 대한 애정이 1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사람을 갖고 버리는 물건 취급을 하는 것이죠.

 

욕심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욕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은 더 나은 것을 향한 일종의 삶의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란 욕심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마음, 올라가고 싶은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담당하는 것이죠. 저는 우리 안에 욕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게 맡기신 소명을 이루는 욕망, 삶의 문제가 넘어서고 해결하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가질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가지려는 태도가 탐욕입니다. 거기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내가 있으면서 밧세바를 탐냈던 그것이 탐욕입니다. 암논이 그것을 똑같이 닮았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분에게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은 욕심이 많았데요. 두 자매였는데 부모님은 언제나 둘에게 똑같이 나눠줬답니다. 그러면 언니였던 그분은 동생 것에 더 눈이 가더래요. 동생 것까지 갖고 싶었데요. 그래서 무슨 묘안을 내서 동생과 거래를 했답니다. 가령,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 같은 것을 해서 기어코는 동생을 자기가 가졌답니다. 동생은 어리고 어리숙해서 그렇게 늘 자기에게 빼앗겼데요. 그렇게 탐욕을 부렸던 그는 결혼을 하고 예수를 믿고는 그런 모습을 버렸답니다. 삶의 고난들을 겪으면서 어느덧 자신은 과거의 모습들을 다 잊고 살았데요. 그런데 옛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 계기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녀를 볼 때였데요. 자녀를 낳고 어디서도 자신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아니 아예 잊고 살았는데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똑같더랍니다. 처음에는 몰랐답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지를요. 혼내고 타이르고 했데요. 그러던 순간, 딱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구나 싶더래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너무 놀랐답니다. 그리고는 이걸 혼낼 수 없더랍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회개를 했데요. 그런 모습이 보일 때마다 이건 내 모습이구나 했데요. 그렇게 자신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안아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자녀들이 달라지더래요.

 

이는 그분 개인의 간증이라서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제게도 똑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녀를 낳으니 내 문제가 그대로 보이더라고요. 어쩌면 오늘 본문의 주제와는 다른 결말 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는 내내, 이 묵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이죠. 물론 저는 죄의 대물림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부모에게 모든 책임을 떠 맡기고 싶지도 않아요. 중요한 것은 가르침에는 나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내 자녀는 나에게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변하는 만큼 내 자녀도 변해요. 내가 자라는 것만큼 내 자녀도 자랍니다. 자녀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다면 그것은 돈도, 건강도 아닙니다. 믿음을 주세요. 좋은 눈, 좋은 생각, 좋은 마음과 평안을 주세요. 그것을 가진 자녀는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성장하고 자랍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혼내지 마세요. 자녀가 좋은 마음을 품길 원하면 내가 좋은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가 옳은 생각을 갖기 원하면 내가 옳은 생각을 하면 됩니다. 자녀가 바뀌길 원하면 내가 바뀌면 되고, 자녀가 성장하길 원하면 내가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녀가 책 읽기를 원하면 내가 책을 읽으면 되고, 자녀가 교회 다니길 원하면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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