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5:7~12 이렇게 네 해가 지났을 때에 압살롬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주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헤브론으로 내려가서 저의 서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이 종이 시리아의 그술에 머물 때에, 주님께서 저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시면, 제가 헤브론으로 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왕이 그에게 평안히 다녀오라고 허락하니, 압살롬은 곧바로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첩자들을 보내서, 나팔 소리가 나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고 외치라고 하였다. 그때에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손님으로 초청받은 것일 뿐이며, 압살롬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다. 압살롬은 또 사람을 보내어서, 다윗의 참모이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인 길로에서 올라오라고 초청하였다. 아히도벨은 길로에서 정규적인 제사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점점 커지니,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도 점점 더 많아졌다.
압살롬이 치밀하다는 것이 또 드러납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으며 인심을 얻는 일을 4년 동안이나 하죠. 물론 그런 반란의 싹이 커지는 동안 다윗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아요. 아니, 눈치는커녕 오히려 압살롬이 자신의 일을 도와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순진한 것일까요? 멍청한 것일까요? 저는 다윗이 멍청하거나 아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의 문제는 가만히 있어서입니다. 아들 문제에 있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죠.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고 분명한 잘못조차 덮어둡니다. 자식 문제가 그래요. 때론 다 이해하겠거니 넘어가고 때론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며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곪고 썩는 마음들을 애써 무시하죠. 마치 우리의 신앙처럼 말입니다. 알면서도 잘못된 자신의 삶의 태도를 가만히 놔두죠.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작은 불꽃의 몸부림을 애써 외면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저절로 잘되기를 바라는 심보가 다윗을 닮았죠.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반역의 깃발을 들 생각입니다. 왜 헤브론일까요? 헤브론에서 다윗이 왕권의 토대를 마련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고향이어서였을까요? 그는 헤브론에 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물론 거짓말이죠. 그런데 왜 하필 헤브론에서 예배한다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헤브론이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적뿐 아니라 행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헤브론은 풍성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시대 이전까지 헤브론은 유대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죠. 헤브론에서 왕권의 기반을 다지고 이스라엘의 통일까지 이룬 다윗이 헤브론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중심지를 옮겼을 때 헤브론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물론 지역적으로 통일 이스라엘의 중심지로서 헤브론은 너무 남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통합을 위해서는 수도 이전의 조치들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타당한 선택이죠. 그런데 그런 의도와는 무관하게 헤브론 사람들의 마음은 섭섭하지 않았을까요?
놀랍게도 압살롬은 그 점을 파고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자신들이 왕을 만들었는데 소외된 기분이라고 할까요? 경제적으로나 정치, 행정적으로 중심이었던 것을 빼앗긴 서운함이라고 할까요? 그들의 마음에는 그런 섭섭함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그들에게 또 다른 지도자의 모습으로 압살롬은 다른 희망이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정확히 맞아떨어지죠. 더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이 되어 갔습니다.
저는 오늘 묵상에서 다윗도 압살롬도 아닌 헤브론 사람들의 마음에 주목하게 되네요. 버젓이 자신들이 세운 왕이 살아있는데 새로운 왕을 그린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배신이고 국가적으로는 반란입니다. 그럼에도 헤브론 사람들이 점점 압살롬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뭘까요?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 모두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단체로 속는 이유는 뭘까요? 그저 압살롬의 전략이 좋았다거나 연기력이 풍부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100%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다 속는 이유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섭섭한 감정, 내 안에 남은 아쉬움과 절망감이 작은 속임에 반응하여 또 다른 욕망과 욕심으로 내달리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는 속습니다.
감정이 상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겠어요. 아프고 아쉽고 속상하고 화나는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납니다. 그것을 꾹 참고 버틸 필요는 없습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속상한 것은 속상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강철 로봇이 아니기에 쉽게 흔들리고 깨집니다. 감정의 기복도 있고, 성질도 나죠. 그런 것이 드러나고 표현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숨길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어요.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고,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감정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섭섭한 마음을 너무 오래 간직하지 마세요. 내 안에 불편한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하지 마세요. 상한 감정을 방치하지 마세요. 섭섭함을 오래 간직하면 무엇인가 나를 찾아옵니다. 압살롬처럼 그 섭섭함을 극대화하는 외부의 공격이 생겨요. 그러면 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우리 마음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말라"고도 했어요. 섭섭한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섭섭함을 오래 간직하지는 마세요. 노여움을 방치하지 마세요. 불만과 불평을 내 마음에 오래 머물게 두지 마세요. 우리의 건강은 들어온 것을 잘 내보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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