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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96 - 불만과 불평에 나를 맡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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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6: 1 ~4  다윗이 산꼭대기에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시바는 나귀 두 마리에 안장을 얹고, 그 위에다가는 빵 이백 개와 건포도 뭉치 백 덩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왔다. 왕이 시바에게 물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왔느냐?" 시바가 대답하였다. "이 나귀들은 임금님의 가족들이 타고, 빵과 여름 과일은 신하들이 먹고, 포도주는 누구나 광야에서 기진할 때에 마시고, 이렇게 하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왕이 또 물었다. "그런데, 네가 섬기는 상전의 손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야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할아버지의 나라를 자기에게 되돌려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이 시바에게 말하였다. "므비보셋의 재산을 네가 모두 가져라." 시바가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임금님의 은총을 입는 몸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피하는 중입니다. 다윗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고비를 맞은 셈입니다. 그의 인생이 순탄하지 않아 삶의 큰 고비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명예스럽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은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비참함마저 가져다주었을지 모르죠. 그런 와중에 아직도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어려울 때 친구들이 더 잘 보이는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미 많은 후원자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잠든 다윗의 영성을 깨우기도 했고, 축 처진 어깨를 세워주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병든 다윗을 치유하는 은혜가 그들을 통해 이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내 곁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 가족들은 그런 존재입니다. 나의 문제를 일깨워 되돌이키게 만드는 회개의 전령이 되기도 하고, 내 아픔과 슬픔, 무거운 짐을 함께 지기도 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기도와 나눔으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친구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과 슬픔의 때, 절망의 나락에 놓인 나에게 어김없이 찾아와 훼방하는 이들이 있죠. 흔들리는 나를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한몫 챙기려는 부정적인 방해자들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바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신하로 현재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모시는 종입니다. 이미 그의 간사함을 우리는 목격한 바 있죠. 그런 이들을 통해 우리는 또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언제나 꽃길은 아닙니다. 늘 선택의 길이죠. 좋은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좋은 길인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하고 걷는 길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선택에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어야 하고, 나를 위해 함께 하는 이들을 먼저 보는 선택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우리 마음에 작은 불만, 작은 불평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어떤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드는지를 보게 되는데요. 그것은 이제 다시 회복의 길로 돌아온 다윗에게서 입니다. 이상하게도 다윗은 시바의 행동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시바는 빵과 과일을 가지고 다윗에게 나왔는데요. 제 눈엔 언제 돌아올지 모를 여정의 길에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이 결코 나빠 보이지 않은데요. 그런데 다윗이 반응이 조금 껄적지근합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가져왔느냐고 콕 집어서 묻죠. 의도가 있는 행동이라는 뜻이죠.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 유추해 보자면 이미 시바의 본성을 눈치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사꾼에게는 언제나 의도된 선함이 있기 때문이죠. 그의 저의를 간파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방해꾼과 친구를 구분할 줄 아는 다윗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택의 순간에 자신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제 눈에는 다윗의 실수가 보입니다. 분명 시바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다윗에게 접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접근은 성공하죠. 다윗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줘버리는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바가 노린 노림수였는데 다윗은 시바의 의도대로 넘어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시바의 저의를 파악한 듯 보였던 다윗이 왜 그리 쉽게 당했을까요? 마치 보이스피싱을 당하듯 눈앞에서 코를 베었을까요?

그 이유에는 다윗의 불평과 불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바에게 이렇게 말하죠. ‘너의 주인은 왜 안 왔느냐?’고 말이죠. 시바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표현해요. ‘너의 주인의 손자’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므비보셋을 사울의 손자로 표현하는 것이죠. 시쳇말로 요나단은 자신의 절친이고 사울은 자신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을 요나단의 아들이 아닌 사울의 손자로 표현하는 것은 므비보셋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죠. 그가 왜 므비보셋을 부정적으로 보았을까요? 이는 지금 므비보셋이 보이지 않아서 아니었을까 싶어요. 자신이 마음을 열어 받아준 므비보셋인데 지금 다윗 자신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보이지 않는 것이 괘씸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 나왔는데 므비보셋이 버선발로 달려 나오지 않은 것이 불편했을까요? 아마도 다윗에게 그런 불평과 불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작은 불만이, 그 작은 불평, 혹은 괘씸한 생각이 다시금 다윗의 이성을 잃게 만듭니다. 결국 시바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 버리죠.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는 이유는 선택이 어려울 정도로 큰 길이 내 앞에 놓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택이 힘든 것은 내 안에 피어오르는 작은 불만과 불평 때문입니다. 괘씸하고 미운, 싫은 감정과 경쟁심, 때론 시기와 질투, 분노와 차별 등이 내 안에서 선택을 힘들게 만들죠. 아니 눈을 가린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아요. 다윗에게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어제까지 그 앞에 나온 믿음의 친구들을 보면서 감사와 감격에 휩싸였던 다윗이, 시바를 보는 순간 므비보셋에 대한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어려운 고행길을 따라나서는 이들을 만류할 정도였던 다윗이, 거동이 불편한 므비보셋이 자신을 따라나서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는 것은 앞뒤가 안 맞죠. 그렇게 작은 불만 하나가 나도 모르게 우리의 이성과 영성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나쁜 생각, 악한 확증편향이 우리를 잘못된 선택으로 인도하죠.

그러니 조금이라도 나쁜 생각에 나를 내어주지 마세요. 불만과 불평에 나를 맡기지 마세요. 작은 불평 하나가 어렵게 쌓은 내 영성을 순식간에 태워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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