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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12 - 우리 손으로 만들어질 하나님나라를 꿈꾸십시오. 6: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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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성전봉헌의 날이 밝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전에서 속죄제를 드리며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전의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합니다. 에스라서를 통해 주시는 성전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9절에는 잡혀갔던 이들이 돌아와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잡혀갔다 돌아온 자들이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죠. 그 역사적인 사건을 굳이 언급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을 떠난 이들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주님께 돌아온 백성들을 의미하는 거죠. 우리들은 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는 내가 단순히 세상의 사람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백성이고, 주님의 계획에 따라 태어났죠.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알고 돌아온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돌아온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켰데요. 유월절은 이제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그 옛날 믿음으로 문설주에 피를 발랐던 이들이 생명을 얻은 은혜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월절의 때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표현했죠. 그 구약의 유월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한다면 우리에게 성전재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리스도의 가치와 정신이 나를 통해 오늘날 되살아나는 것, 그것이 성전 재건의 의미가 되는 거죠. 

요한복음 2장에는 소위 ‘성전정화’라고 이름이 붙은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채우고 있는 장사꾼들을 향해 크게 화를 내시면서 몰아낸 그 사건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요2:19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해가 더 필요한 것은 또 있습니다. 이는 성전이 곧 그리스도 당신을 의미한다는 사실이죠. 우리의 성전은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입니다. 우리가 재건하고 지켜야 할 성전은 높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죠. 우리에게 성전이 소중한 것은, 나의 복, 내 위로, 내 평안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명과 뜻, 은혜와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나를 위한 성전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을 우리가 새롭게 재건해야 함은, 우리 안에 사라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성전정화사건의 배경을 보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성전에서는 각종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했죠. 그러다 보니 멀리서부터 제물을 가져와야 하는 불편이 따랐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간편한 시스템을 원하게 되었는데요. 성전에서 그 제물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했던 것이죠. 이미 여러 차례 이 광경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간편한 시스템을 탓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전통을 지켜야 하는 것이 핵심이지도 않고요. 간편하고 간단한 것이 잘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정성이 어쩌느니 논하는데 저는 간편한 것이 정성과 크게 상관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편하든 불편하든, 어렵든 쉽든, 마음먹기 나름일 뿐입니다. 간편하다고 정성이 없는 것도 아니듯, 힘들게 했다고 해서 정성이 갸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간편한 것, 스마트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객이 전도된 것이 문제죠. 제물이 필요한 이유는 나의 마음의 표현이고, 나의 죄를 고백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고백이나 마음보다 제물이 무엇이냐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좌판과 장사꾼을 몰아내신 것은 거기서 사고파는 일이 벌어져서가 아닙니다. 요즘에도 이 때문에 교회에서는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는 곳도 있죠.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이 쓸어내시고자 한 것은 주객이 전도된 우리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경건해도 주객이 전도되었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아무리 목사여도,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개인의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것은 목사가 아니죠. 아무리 교회에 수천 명이 모이고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아도, 그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을 쫓는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주객이 전도된 교회 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친구 보러 오늘 나오지는 않았나요? 혹시나 믿음 없거나 신의 없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나오시지는 않았습니까? 그것이 내가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았나요? 사실 우리교회는 모두 솔직하셔서 누구 때문에 교회 나오고 하지 않으시죠. 좀 그래주셨으면 할 때가 있죠.^^ 누구 때문이라도 좀 예배에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농담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친구를 사귀고, 사랑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그런 공동체 되는 것이 귀중하죠. 예수께서 쓸어버리신 것이 장사가 아니었듯, 여러분이 사랑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있는 이유, 우리가 교인인 이유,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이유는, 그분의 생각, 그분의 정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주님의 말씀 앞에 나를 복종케 하고, 새로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비록 내일 잊는다고 해도,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말씀 앞에 자신을 바꾸고 세우려고 오신 것이죠. 아이 주일학교에 보내려고 온 것 아니고, 밥 먹으러 온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합니다. 저는 주일학교도, 공동체 식사도 우리 교회의 자랑거리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자리라고 믿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잘 드려주는 것도, 밥이 모자라는 것도, 우리 남자 집사님들, 산더미처럼 밥 퍼가는 것도 기쁘고 즐거워요. 그러나 그렇다고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아이 잘 보려고 교회 나오는 것 아니고, 한 끼 때우려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면 그렇게 주객이 전도된다고요. 우리는 조금만 마음 놓으면 저절로 그렇게 뒤틀린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고요. 아이들이 소란하고 상태 안 좋고, 더 돌봄이 필요한 주일이 오면, 여러분은 이런 생각하면 좋겠어요. ‘내가 더욱 집중하여 말씀을 들어야겠구나.’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방심하면 아이만 돌보다 간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주객이 전도된 예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이렇게 말하죠.

딤후3:5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겉은 번지르르한데 알맹이는 없다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이 말씀은 마지막 때의 타락상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죠. 그 바로 전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딤후3:4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 이것을 우리는 주객전도라고 하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찬양하도록 지음 받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쾌락이라고 하니까 대단해 보이죠? 마치 어디 음침한 소굴에 가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만이 쾌락처럼 여기시나요? 어쩌면 이 쾌락은 이런 것일지도 몰라요.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보다 자신의 유익을 더 바라고, 자신의 부와 얻을 것에 더 집중하는 것, 그것이 쾌락 아닐까요? 성전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무너졌어요. 공의의 하나님을 따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정의의 하나님을 따라 나의 유익에 상관없이 옳은 것을 쫓는 그 가치관이 무너진 것이 바로 성전이 무너진 것이죠. 수많은 교회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약한 자와 소외된 자, 가난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자를 위해 편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모이는 단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이 오직 적의와 적대감을 드러내며 죽이려 드는 이익단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어디 교회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혈통은 있으나 그 안에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이스라엘처럼, 교인이라는 타이틀은 있으나 그 안에 주님의 말씀과 가치관이 없이 사는 우리들이 바로 무너진 영혼들 아닙니까? 붉은 빛을 발하는 십자가는 있지만, 진정 희생의 피는 흘릴 줄 모르는 교회가 바로 무너진 성전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회복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믿음이 쌓이고 거룩한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초가 다시 쌓아지기를 지금 원하십니다. 성전이 재건되기를 원하시고, 희미해진 불꽃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바라시죠. 중요한 것은 그 기초를 우리의 손으로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손으로 성전을 재건하듯이 우리의 무너진 제단은 우리의 손으로 다시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분명히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 일을 나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하나님께 우리의 손에 힘이 있도록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읽었지만 에스라4:4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죠.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방해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힘이 빠졌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새번역은 사기가 떨어졌다고 번역해 놓았죠. 사탄은 하나님의 힘을 빼앗지 못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우리 손에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곁을 떠나면 우리의 손에 힘이 빠지죠. 마치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힘이 빠지면 전쟁에서 지고, 힘이 생기면 전쟁에서 이기듯 말이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손으로 주님의 권능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 저는,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적혀 있으니 매일묵상을 하신 분들은 저와 같이 똑같은 질문을 받으셨겠죠. 그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네가 원수들의 노예가 된 이유가 무엇이냐?”

저는 그 질문을 다른 언어로 받아들였습니다. 

“네가 이 모양 요 꼴로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그 질문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질문은 확장되어 저에게 새로운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진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세상이 험해지고, 빈부의 격차와 차별과 계층의 문제가 생긴 건 누구 때문이냐?”

그 질문 앞에 저는 핑곗거리가 많았습니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못 배워 먹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문제 있는 사람들이 힘을 가져서 그렇다고 말이죠. 제 대답의 대부분은 ‘너’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할 말이 많습니다. 부모 잘못 만나 인생이 꼬이고, 사람 잘못 만나 사랑을 잃었다고요. 좋은 선생을 못 만나 배우지 못했고, 거지같은 사회를 만나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요. 이것을 마치 정답처럼 달고 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다른 정답을 주셨습니다. 이는 예레미야를 통해 나에게 주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렘2:17    주 너의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도, 네가 주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 스스로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 아니냐?

그날 아침 묵상했던 말씀을 그대로 다시 한번 옮깁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정치가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가 시끄러운 것도 수많은 전쟁과 다툼, 수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도,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이 모여서 탐욕이 들끓는 사회가 만들어지고요. ‘나’의 이기심이 모여 서로를 경계하고 폄훼하는 차별을 만들죠. ‘나’의 경쟁심, ‘나’의 욕망이 모여 빈부의 차이와 소외를 낳는 계층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한 사람 때문이고, 우리의 죽음 또한 한 사람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내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는 나로 인해 민족주의가 만들어지고, 민족 간의 갈등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내 피부색, 내 핏줄을 자랑하면, 그것이 곧 인종차별이 되고요. 내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는 것은 나치나 파시즘과 같은 독단과 독재의 시작이 되는 것이죠. 전 세계적으로 기아대책은 사라지지 않는 큰 문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은 전 인구의 3/4이 기아 문제에 놓여있다고 하죠. 지구 곳곳에서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내가 지금, 식탐을 부리는 이 순간이 모여 기아와 가난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연간 식량은 전 인류가 먹고도 30%가 남을 만큼 많은 양입니다. 그런데 왜 기아 문제가 일어날까요? 전쟁은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라고요? 우리가 분노하는 그 순간, 순간이 모여서 전쟁이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드러납니다. 바울이 이어서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롬5:18~19.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죄가, 또한 한 사람으로 인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우리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세워진 사회 또한 우리의 손으로 새롭게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의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로 인해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또한 나로부터 모든 문제의 해결도 시작되죠. 나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가 되고, 나의 평화가 인류의 평화가 됩니다. 나의 깨달음이 세상의 앎이 되고, 나의 사랑이 공동체의 소망이 되죠. 그렇게 나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또한 나는 그런 ‘위대한’ 존재죠. 하나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될수도, 의인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사람들이죠. 자신의 위대한 은혜의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의 손을 통해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게으름 등 내 안의 적들과 싸워야 하고, 원수들의 방해와도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겨워도, 아무리 높아 보여도, 아무리 깊어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도우십니다. 그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는 이 땅,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되어야 합니다. 성전을 재건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무너진 영성을 다시 세우세요.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을 품으십시오. 주님이 복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의 복을 받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입니다. 나의 욕심으로 인해 무너진 영성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공의로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당신의 손으로 만들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세요. 그것이 비전입니다. 당신의 손으로 세워질 성전을 꿈꾸세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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