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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10 -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면 우리는 고생합니다. 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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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컴퓨터가 일상화 되어서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컴퓨터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었죠. 그러나 컴퓨터가 이렇게 일반화 된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제는 80년대 대학을 다녔는데요. 그때만 해도 개인용 컴퓨터는 없었습니다. 요즘 리포트나 보고서를 손으로 쓰는 사람은 없죠. 그러나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모든 리포트를 손으로 써서 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데요. 리포트를 쓸 때 여러가지 형형색색의 펜을 사용해 작성한 적도 있죠. 글씨가 한번 틀리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수정펜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이건 거의 최고의 발명품 같은 느낌을 받았드랬죠. 그러다 타자기라는 것이 등장했고요. 그것이 변행되어 워드프로세서라는 전자기기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워드프로세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라 타자기의 일종이었는데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겁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그 연수를 제대로 다 못하고 단명한 제품이었으니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를 접한 것은 8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명색이 개인용 컴퓨터라는 혁명적인 시대를 연 컴퓨터가 바로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애플컴퓨터입니다. 물론 특정한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고, 간단한 타자 기능과 컴퓨터 게임의 효시라도 할 수 있는 팩맨 게임을 구동하는 것이 전부였죠. 소형화 된 것은 틀림없지만 개인용 컴퓨터라고 하기에는 쓰임새가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용한 컴퓨터는 애플 매킨토시 클래식이라는 것이었는데요. 이를 개인적으로 사용했다기보다 스튜디오에서 음악 작업용으로 사용한 것이죠. 

그러다 90년이 넘어서야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IBM 컴퓨터가 처음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용 컴퓨터가 상용화된 것이 채 30년이 안 되는 셈이죠. 물론 초창기 컴퓨터는 지금과 달리 다루기 부담스러운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제가 첫 목회지에서 목회를 할 때, 모교회에 교원으로 일하시는 분이 계셨는데요. 그분이 학교 선생님들께 지급된 컴퓨터를 빌려주셨어요. 자신에게 이래저래 2대가 지급되었다며 제게 쓰라고 주신 거죠. 그런데 이 컴퓨터가 당시 가격이 300만원쯤 했거든요. 지금보다 돈의 가치가 더 높았으니 지금으로 보면 한 500만원쯤 하려나요? 500만원짜리 컴퓨터라고 안 사시겠죠? 만약 산다고 해도 정말 최고급의 최고급으로 구성된 컴퓨터가 될테죠. 그러나 제가 온 컴퓨터는 어땠는줄 아세요? 컴퓨터를 배달하는데 트럭이 왔어요. 서비스 직원이 직접 와서 설치를 해 주었고요. 모니터는 혼자 들기 어려울만큼 무거웠고, 본체는 책상에 올려놓으면 무너질것 같이 컸습니다. 게다가 하드디스크가 없는 제품이었습니다. 젊은 분들은 이해가 안 가시죠? 하드디스크가 없는 컴퓨터가 어디 있을까 싶으시겠지만 정말 하드 디스크라는 것이 없었고요. 휴대용이었던 플로피 디스크라는 것을 껴야 구동이 되는 방식이었죠. 플로피 디스크라는 말도 생소할텐데 말이 좋아 휴대용이지 요즘 휴대용인 USB 디스크 같은 것을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이 플로피 디스크라는 것이 책받침처럼 얇은 플라스틱이었고요. 용량은 500kb였어요. 감이 안 오시죠? 보통 1Mb의 절반에 해당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전화기 용량이 16GB인데요. 요즘에는 줘도 안 갖는 용량이죠. 아마도 여러분의 휴대폰 용량이 최소한 30GB는 넘을 것입니다. 제 전화기 용량으로 비교하면 1/30,000도 되지 않는 용량이죠. 한마디로 요즘은 없는 것과 같은 용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컴퓨터가 당시에는 너무 대단해 보이고, 훌륭해 보였어요. 그리고 거대함과 위압감에 만지기조차 힘들만큼 다루기 어려웠죠. 엄청난 가격에, 낯선 기계 앞에서 저는 주눅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 왠 주의사항은 그렇게 많은지... 켜기 전에 해야 할 일, 끄기 전에 해야할 일... 아뭏든 이건 사람을 도울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도와주어야할 물건 같았어요. 그렇게 설치기사는 조심히 다루라는 말만 늘어놓고 갔습니다. 

이 거대한 물건을 알현하고는 맞이한 첫번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렇게 설치를 마치고, 무슨 성경책 두께의 절반정도 되는 설명서를 주고 갔는데 읽을 염두가 나지 않아 팽겨치고는 혼자 컴퓨터를 키려고 파워버튼을 눌렀는데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어디서 기계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 저이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요. 어제는 분명히 불이 들어왔는데요. 아예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떻게 켜는지도 몰라서 헤매기도 했고요. 이리저래 한참을 만져도 컴퓨터 어디에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고장이라도 낸 걸까 자책을 하며 할 수 없이 어제 왔던 서비스 기사에게 전화를 했어요. 다행이도 서비스 기사는 그날 바로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보더니 아주 간단히 컴퓨터를 켜 주었습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싶어 배우고 싶은 마음에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서비스 기사가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한 마디 하더라고요. 

"전원을 꽂으셔야죠..."   

 

미국 LA지역의 오렌지 카운티에는 한인타운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먼저 한인타운이 형성된 곳은 가든 그로브라는 지역입니다. 근처에 디즈니월드가 있어서 유명한 곳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곳에는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 따로 있습니다. 크리스탈 캐시드럴 처치, 우리말로 수정교회라고 알려진 이 교회는 대형유리 1만664장으로 외관을 장식하고 규모 8.0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는 구조를 가진 건물로, 내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고, 메가처치의 대명사로 여겨진 교회로도 유명하죠. 이 교회는 많은 개신교인들의 명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약 8년 전, 미국을 대표하는 이 개신교 교회 중 하나인 수정교회는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크라이스트 캐시드럴, 얼핏 듣기에는 크리스탈 캐시드럴에서 크라이스트 캐시드럴로 이름만 바뀌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한국말로 번역하면 수정교회에서 그리스도 대성당으로 바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가 카톨릭재단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의 원조이기도 한 로버트 슐러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개척하고 시무했던 이 교회가 많은 재정적인 문제를 겪은 끝에 파산하고 만 것이죠. 이 일로 많은 현대교회가 큰 충격에 쌓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체와 매체에서, 한때 수 만의 교인이 모이던, 미국을 선도하던 교회가 이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를 분석한 기사들을 쏟아 내었죠. 그 분석의 주된 요지는 대부분, 로버트 슐러목사의 은퇴 후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한 것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세습을 넘어 아버지와 아들의 분쟁, 아들과 딸간의 분쟁 등을 겪으면서 급속도로 리더십을 잃어갔던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었죠. 실제로 로버트 슐러목사는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준 이후,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아들마저 쫓아내고 딸을 다시 담임목사직에 앉히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불거진 여러 갈등이 교회 분화와 어려움의 요인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습이 진정한 문제였을까요?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는 한국교회에서도 현재진행중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분석의 정확성 유무는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미칠테죠. 정말 세습이 악이어서 몰락한 것일까요? 저는 세습과는 관계없는 목회를 하고 있지만 목사의 아들인 관계로 이 문제를 두둔하거나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분석이 정확한 분석인가 하는 점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기 때문이죠.

만약 교회의 몰락이 세습에서 비롯된다면 세습은 교회의 가장 악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권세를 무너뜨리고 몰락을 가져오는 주범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비록 세습을 했지만 영적으로 온전히 주님 앞에 서고, 겸손히 주님 앞에 기도하며 자신의 본문을 다하는 목회자라면 어떨까요? 그럼에도 세습했기에 마치 원죄처럼 몰락해야만 할까요? 우리는 교회의 몰락을 어쩌면 쉽게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잘못, 지도자의 몫, 제도의 문제, 상황의 문제로 쉽게 치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쉽게 치부할수록 근본적인 문제는 더욱 깊이 숨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우리는 그렇게 잘못된 관행과 문제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죠. 

로버트 슐러 목사는 한 세대를 풍미한 목회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와 광림교회 김선도목사가 이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졌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긍정의 힘의 원조로 그는 목회의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개척한 수정교회는 급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의 중심 사상은 번영신학이었어요. 그의 목회 철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기업으로, 선교를 비즈니스로, 신자들을 고객으로]라는 슬러건이었어요.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그의 메시지는 많은  백인 중산층의 호응을 얻었고, 세련된 시스템, 조직적인 운영과 결과가 명확한 비지니스적 선교방식, 그리고 마치 고객에게 서비스하듯 드려지는 예배에 멋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호텔처럼 멋진 공간에서, 마치 멋진 공연장의 무대처럼 풀오케스트라 연주의 품위 넘치는 예배는 부자들이 누리는 커뮤니티 같았죠. 몰락은 단순한 세습이 아닙니다. 그 교회에 잘못된 신학에 있습니다. 교회가 마치 자신들의 신분을 보증하는 곳으로 여기고, 선교는 마치 정복자의 위세처럼 하며, 긍휼도, 사랑도, 십자가도, 희생도, 낮아짐도 찾아볼 수 없는 자기만족의 잘못된 신학이 몰락의 이유죠. 어쩌면 이 교회의 몰락을 세습이라고 치부하면서 여전히 그들의 번영신학은 그대로 차용하는 오류를 우리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의 권위라는 미명하에 건물은 더 웅장하고 높아지면서 여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이 수정교회의 몰락과 다르지 않아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 알아야 온전한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여러가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죠. 그리 썩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지인 중에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에게는 금지옥엽 아들이 있었는데요. 귀한 외아들인지라 그 집안에 최우선 순위였죠. 그런데 그 아들이 몸이 허약했어요. 잦은 잔병치레와 함께 점점 말라가고 기운도 없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아들에게 좋은 약은 다 지어 먹였습니다. 좋다는 한약재를 찾아다니며 구해 먹였죠. 그런데 결국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들은 악성종양이 있었는데 그만 알지못하고 한약을 먹이다 보니 그 한약이 더욱 종양을 자라게 해서 건강을 악화시켜버린 거죠. 결과적으로 부모의 정성이 아들을 더 빨리 숨지게 만든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듯 원인을 잘못 분석하면 낭패를 봅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 우리는 피부과적 치료를 우선하죠. 그러나 많은 경우 피부 트러블의 원인은 소화기 계통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피부과적 치료만 한다면 오히려 더 악화가 될 수도 있죠. 

대부분의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해서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의 근본적인 문제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70년을 지난 지금 성전을 재건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왕들의 잘못이고, 외세의 잘못입니다.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왕들이 죄악의 길로 가는데 지도자가 아닌 내가 어떻게 올바른 길로 가느냐?"

"저 악한 이방민족들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거야..."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상황을 바라보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지극히 표면적인 것만을 바라볼려고 하죠.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나의 어두운 문제를 자기 스스로 보려고 하지 않죠.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11절)

"우리가 하늘의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1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다고요? 아닙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 어찌 우리가 마음에 드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스럽게 봐주시기 때문이죠. 세상이 문제라고요? 아닙니다. 그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나 자신”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이 어찌 세상을 변화시키냐고요? 그렇다면 내게 맡겨진 자리에서나마 작은 변화라도 만들고는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은 그 작은 불꽃이 큰 불을 일으켜 하나의 불이 되게 하기 위해서죠. 그렇게 근본적인 문제를 보고 해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생각과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죠. 이방 왕 다리오가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합리성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면 우리는 고생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있는 지혜는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풍랑 속에서 잔잔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처럼, 곁가지가 아닌 내밀한 눈과 깊은 성찰의 신앙을 지닌 신앙인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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