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자유를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가 충만한 날입니다. 그 은혜에 힘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는 여러분을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나누시겠습니다. “새롭게 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에스라서 묵상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이념이 아니라 여러분 각 영혼에 필요한 말씀으로 임하기를 기도하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시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위키리크스]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위키리크스는 고발 전문 웹사이트입니다. ‘위키’라는 말은 하와이어로 ‘빨리빨리’라는 뜻을 가진 ‘위키위키’에서 따온 말이라더군요. 이 말을 쓰는 또 다른 유명한 웹사이트가 [위키피디아]라는 것이 있죠.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 사전이라는 뜻의 웹사이트입니다. 저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죠. ‘리크스’는 기밀 누설자라는 뜻으로, 위키리크스는 전세계 각 정부와 기업, 단체의 불법·비리 등 비윤리적 행위를 알린다는 목적으로 2006년에 설립되었죠. 2007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이라크의 일반 민간인과 취재하는 기자들을 사살하는 장면의 영상을 공개해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고요. 아프리카 튀니지 대통령의 부패상을 폭로해, 튀니지의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자스민 혁명을 이끌기도 했죠.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건도 다수 폭로했었죠.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낸 분의 형님이 국회의원시절 미국 대사를 만나 ‘내 동생은 뼈속까지 친일이고 친미’라고 한 말이 공개되었고, 지금은 감옥에 있는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이비 종교지도자가 그의 몸과 마음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미국 국무부 보고서가 폭로되어 큰 충격을 주기도 했죠.
그 단체를 만들고 각국의 주요 문건, 특별히 미국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비밀문건들을 폭로해서 미국으로서는 일급 범죄자 취급을 받는 언론인 줄리안 어산지가 지난주, 영국 런던의 엘살바도르 대사관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미국정부의 체포를 피해 엘살바도르 대사관에 망령한지 7년만의 일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왜 7년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엘살바도르는 그의 체포에 동의했느냐 하는 점인데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대통령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죠. 이전 대통령은 미국과 각을 세웠던 대통령이었다면 바뀐 대통령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죠. 좀 허무하죠?
이와 비슷한 일이 오늘 본문에서도 일어납니다. 귀향한 유대인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하죠. 물론 완전한 귀향은 아닙니다. 아직 일부만이 귀향한 상태였기에 그들의 성전 건축은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죠. 아직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페르시아에 포로로 머물고 있었고,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바뀐겁니다. 정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왕이 바뀐 것이죠. 왕이 바뀌자 귀향한 이스라엘에 대한 견해도 바뀔 수밖에 없었죠. 이전의 왕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의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에 이르러서는 그런 의견들이 다소 줄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스라엘에 내린 성전 건축 허가를 중지까지 하지는 않았겠죠. 여기에 작용하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지난 주부터 계속되는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의 방해공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자 이스라엘을 모함하기 시작합니다. 그 방해는 단순히 공사를 못하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어떤 건축을 하려고 하면 결사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수막을 붙이고, 공사 현장에서 시위도 하죠. 어떨 때는 공사장 바닥에 드러 눕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지 않죠. 구청과 시청에 계속 민원을 제기하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건축을 허락해 준 페르시아에 계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습니다. 갖은 억측과 고발을 했겠죠. 그들이 무슨 말로 상소를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코 좋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주목해야 할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들의 상소는 성전건축을 허락한 고레스 왕 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레스왕은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을 지시한 왕이었습니다. 당연히 거부되었겠죠. 이제 고레스왕이 죽고, 그의 아들 다리우스가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때도 그들의 상소는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왕위는 아하수에로에게 이어졌는데요. 그때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이 낯익으실텐데요. 에스더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 아하수에로와는 관련이 없는 동명이인입니다. 아무튼 벌써 왕이 세 번 바뀔 때까지도 그들의 상소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모함은 통하지 않았어요. 이쯤되면 포기할만도 한데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낙사스다 왕까지 이르렀습니다. 수없이 좌절을 했음에도 그들은 또다시 모함과 거짓과 불법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관철을 시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상소 내용이 4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대략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으면 페르시아를 배반할 것이라는 억측과 추측과 거짓의 내용이죠. 아낙사스다 왕은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제국을 넓혀 나가는 과정 가운데 식민통치를 하는 나라가 반기를 드는 것은, 제국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죠.
지난주, 우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보았습니다. 새벽, 한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에 놀라 뛰어나가는 이들을 복도에서 기다린 한 남자가 경황이 없이 나오는 이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거죠. 이로 5명이 숨지고, 13명이 중상을 당하는 일이 있었죠. 너무 안타깝고 어쩌구니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저 층간소음으로, 이웃간의 다툼으로 시작된 일이었다는데요. 저는 이 사건을 보며 한동안 충격에 쌓였습니다. 참혹한 사건도 사건이지만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치밀함이었습니다. 어떻게 불을 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두를 생각을 했을까요?
악은 선보다 항상 성실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에는 그리 악착같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하고, 할 수 없다면 안 하죠.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쉽게 포기합니다. 사랑을 나누다가도 작은 말 하나에 모든 것을 깨뜨립니다. 감사하다는 말 하나 없다고 우리의 나눔은 금세 식어버리고요. 나의 시간이나 여력이 없으면, 기분이 나지 않으면, 선한 일은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은 다르죠. 끈길집니다. 포기를 모릅니다. 거부 당했다고 낙심하지도 않아요. 벽에 부딪쳐도, 앞길이 가로막혀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악은 강하지 않습니다. 악은 힘도 쎄지 않아요. 그런데 악이 정말 무서운 것은 성실 때문입니다. 악은 부지런하거든요.
악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어요. 악에는 긍휼도 없죠.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휘청이고 정신을 잃어간다고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힘을 잃고 쓰러져도, 정신을 잃고 휘청거려도, 결코 성실을 거두지 않습니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결코 쉬는 법이 없죠. 아주 오래전에 고교얄개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유행했던 오락영화였죠. 젊은 분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이승현씨와 강주희씨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덕화 - 임예진씨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가 여러 시리즈가 나왔는데요. 그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요. 어느 시대든 학교에는 짱이 있었죠. 주먹질로 학교를 주름잡는 아이 말이죠. 그런데 주인공이 이 짱에게 도전을 합니다. 물론 흠씬 두들겨 맞죠. 그런데 이 주인공이 맞아도 다음날 대들고, 맞아도 또 도전을 하고, 심지어 그 짱이 가는데마다 따라 다니고, 잘 때에도 나타나고, 결국 주인공은 주먹 한 대 때리지 못하고도 그 짱의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는 그 장면을 우습고, 재미나게 처리했지만 저는 그것을 보면서 뭔가 끈기에 관한 가치관들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악이 그래요.
그런데 이에 비해 선은 양심이 있어요. 긍휼도 있고, 젠틀합니다. 인정도 있고, 사정도 잘 봐줍니다. 이해는 물론이고 용서도 잘하죠. 저는 여러분이 그런 선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함에 성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긍휼 좋아요. 이해도 좋고, 용서도 좋아요. 그런데 거기에 성실이 없으면, 끈기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한두 번 용서하고, 이해하고, 나누고 베풀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것이 없어요. 귀찮고 힘들어요. 그러면 점점 안 하게 되죠. 그래놓고는 이렇게 말하죠. “용서했더니 소용없더라” “나누고 긍휼을 베풀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더라” 얼마나 긍휼했다고, 얼마나 용서하고, 얼마나 이해해 줬다고 그런 말을 할까요? 과연 선함이 악보다 성실할까요? 과연 신앙이나 믿음이 방해보다 끈기가 있나요? 선함에 치밀함과 부지런함이 없으면 그 선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전 건축을 허락받았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포로에서 귀환했다고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죠. 포로에서 풀려난 것은 하나님의 역사예요. 그러나 이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짓도록 허락된 것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그러나 그 성전을 짓는 것은 우리입니다. 허락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은혜가 주어졌다고 끝난 게 아니라고요. 그 은혜를 부여잡고, 은혜의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하죠.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날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이기고 살아나 이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부활이 끝이 아니에요.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우리가 저절로 그 부활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부활의 시간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죠. 그것도 성실히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활의 멍석을 깔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야죠. 성실히 말이죠.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는 성실을 잊으면 그 부활의 은혜는 언제든 중단될 것입니다. 악은 아직 성실하니까요.
이솝우화에 나오는 모두다 아는 이야기 토끼와 거북이, 우리는 이 대결이 말도 되지 않는 대결임을 이미 압니다. 그런 대결은 하는 게 아니에요. 토끼와 거북이는 기준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해보면,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가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이미 악과 대결조차 될 수 없는 우월한 자리에 놓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거북이가 아닌 토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냥 토끼처럼 뛰면 이기게 된 것이죠. 마치 나답게, 인간답게 살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토끼가 경기에서 집니다. 승리의 원인은 거북이에게 있지 않아요. 토끼에게 있었습니다. 부활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물에서 건져졌습니다. 이제 물에서 경주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뭍에서는 거북이는 느리죠. 부활로 인해 악은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치 거북이가 뭍에서는 토끼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문제는 선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거죠. 그리스도인들이 성실하지 않아요.
많은 분들이 기독교 신앙을 착각합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신앙인들 가운데는 불로소득을 하려는 이들이 많아요. 나는 가만히 있고, 어디선가 불이 떨어져 내가 갑자기 영성 깊은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죠. 세상의 온갖 처세에 관한 세미나는 찾아 다니면서 신앙의 성숙을 위한 노력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깊은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죠. 기도에 성실하지 않으면서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투정은 잘합니다. 한마디로 공짜로 얻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팽배해요. 너무 거친 언사를 드려서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이 열심을 내지 않아요. 선을 추구하는데 열심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데 성실하지 않아요. 어찌 성경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주에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말이 나왔어요. ‘과연 좁은 길이 무엇인가?’ ‘가난한 것이 좁은 길인가?’ ‘그냥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가난해지는데, 그렇다면 가만히 있으면 좁은 길로 가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였어요. 저는 그 대화에 강한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나중에 한번 정리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 좁은 길이라면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고, 땀 흘려 애써 가야 하는 길 아닙니까? 넓은 길은 길이 넓어서 사람들이 그냥 가는 길이라잖아요.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가난해지는데 가난해지는 것은 넓은 길을 가는 것 아닙니까? 제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오히려 좁은 길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길이라잖아요. 알아야 가고, 노력하고 찾아야 가는 길이잖아요. 그렇다면 열심을 다해, 최선을 다해 성실히 공부해야 좁은 길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겨운 공부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해 드려서 죄송한데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악은 악한 것을 공부합니다. 악은 악에 대해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해요. 그런 악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선을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주는 대로 먹고, 가만히 있으면 살찝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살쪄요. 물론 체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클린 세상은 없어요. 어디나 병균은 도사리고, 질병은 창궐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청정지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병을 이길 몸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실해야죠. 운동도 해야 하고, 먹을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공부도 해야 해요. 비타민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라더군요. 어떤 이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데요. 그것을 알려면 나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려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룩인지 공부를 해야 하죠.
사랑하는 여러분, 선에 성실하지 않으면 악을 이길 수 없어요. 여러 어려움에도, 거절과 고통과 문제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함을 유지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부활정신은, 우리가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뿌린 씨앗을 우리가 가꾸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성실이 필요합니다. 중단되었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거절되었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으로 가는 길을 언제나 성실하게 걸으세요. 요셉의 성실을 기억하세요. 선함을 알아가는데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나도 선에 성실해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그러나 기도만 하지 마세요.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말씀만 보지 마세요.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더 많은 세상을 보세요. 더 많은 책들을 읽으세요. 여러분의 정서를 키우고, 사고의 깊이를 늘리세요. 악에 대항할만큼 실력도 키우세요.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자만하지 마세요. 주님이 나를 살리셨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주님의 용서를 나의 권세로 키울 실력이 있어야 하고, 나를 살리신 주님을 위해 이제는 선한 역사를 만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 가족들은 선에 성실하시길 빕니다. 끝까지 선이 관철되도록 물고 늘어지는 용기가 있기를 바래요. 선함에 포기를 모르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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