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러분은 스포츠 좋아하세요? 저는 보는 것을 매우 즐깁니다. 축구, 야구, 농구등 인기종목은 물론, 테니스, 스케이팅, 아메리칸 풋볼, 심지어 최근에는 컬링까지 다양하게 좋아합니다. 컬링, 지난해 평창올림픽에서 우리 국민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죠? 아마도 우리 국민들이 이제 컬링의 방법이나 규칙들을 다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스포츠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묘한 매력을 지녔어요.
최근에는 메이저리그라고 하는 미국 프로야구가 개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류현진 선수가 개막전의 선발투수로 나왔죠. 개막전 선발투수라고 하면 그 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야구선수로서 대단한 영예이기도 하죠. 정말 잘 던져서 벌써 2승을 했습니다. 두 번 나와서 두 번 다 이겼으니 현재까지 승률 100%인 셈입니다. 보통 10승 정도를 하면 투수로서는 수준급 선수로 여겨지는데요. 시즌 초반 2승이니 현재 페이스대로라면 어림잡아 10승은 무난할 것 같고, 더 나아가 20승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상입니다. 20승 투수는 특급투수들의 상징이기도 하죠. 그런데 류현진 선수의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는 보통 자신들의 경기장, 그러니까 홈경기장이라고 하죠. 홈경기장에 상대방 선수를 불러서 경기를 하기도 하고, 상대방팀의 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하기도 하거든요. 보통 이를 홈경기, 원정(어웨이)경기라고 부릅니다. 류현진 선수도 보통 1/3정도를 홈에서 경기하고, 나머지는 원정경기를 치룹니다. 그런데 유독 홈경기에서는 극강의 모습을 보이죠. 홈경기의 승률이 80%를 넘습니다. 10번 나오면 8번은 이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반면, 원정경기는 어떨까요? 50%가 채 되지 않습니다. 반타작도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사실, 이런 문제는 류현진 선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축구가 있죠. 축구에도 저마다의 리그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리그가 바로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죠. 이 축구경기에도 홈경기가 있고, 원정경기가 있습니다. 프로야구와 비슷한 비율로 경기를 하는데요. 여기서 승률은 어떻게 될까요? 35년동안 경기를 분석한 결과, 홈팀은 2번 중에 1번 이상을 이겼고, 원정팀은 5번을 경기해야 1번 정도 이기는 비율이었다고 해요. 박지성선수가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팀은 홈경기에서 무려 86%나 된다고 합니다. 2011년도에는 19번 경기중에 18번을 이겼데요. 대단하죠. 이것을 전문용어(?)로 홈 어드밴티지라고 말합니다. 홈에서 하면 유리하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똑같은 경기인데 왜 유독 홈에서 하는 경기는 더 승률이 높을까요? 홈팀이라고 심판이 봐주거나, 혹은 홈경기여서 점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왜 홈경기라고 더 승률이 높은 것일까요?
이는 저만의 궁금증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이미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홈 어드밴티지에 관한 많은 연구들 중에는 이런 의견들도 있습니다. 원정으로 멀리 가거나, 혹은 먹을 것들이 달라질 경우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죠. 어렵게 말해서 그렇지 한마디로 집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과학적 데이터는 자신이 익숙한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가면, 몸에서 세포들도 반응을 해,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그런데 저에게 가장 눈길이 가는 연구결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로 응원이죠. 홈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말입니다. 영국 노섬브리아 대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홈 관중들의 응원을 받을 때, 선수들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70% 정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테스토스테론이란,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일종으로, 그것이 증가하면 자신감이 상승하고, 승부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미 커디(Amy Cuddy)는 테스토스테론의 변화를 실험했는데요. 두 실험 집단에게 2분 동안 힘 있는 자세와 힘 없는 자세를 취하도록 했데요.
그리고는 두 집단에게 면접을 보도록 했는데요.
그랬더니 면접에 임한 두 집단이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고 합니다. 힘 있는 자세를 취했던 집단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면접에 참여했는가 하면, 힘 없는 자세를 취했던 집단은 그 반대였다는 거죠.
이들을 검사한 결과, 힘 있는 자세를 취한 집단은 테스토스테론이 20% 증가한 반면, 그렇지 않은 집단은 오히려 10% 감소한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단지 자신있는 태도만 취했을 뿐인데, 단지 기운없는 마음만 먹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좀 충격이기도 하죠. 에이미 커디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연구했어요. 어쩌면 우리의 마음가짐, 우리의 태도, 그리고 우리가 가진 생각과 표정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우리의 삶에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난주부터 영적 회복을 위한 3가지 키워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3가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우리가 복창까지 했었죠? 기억하시나요? 바로, ‘세우고’, ‘지키고’, ‘드리자’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다시 세워야 하는 것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우리에게 주신 자리, 내가 서 있는 곳, 내가 지금 섬기고, 지금 있는 자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매일 묵상을 하면서 저는 제목으로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지금의 자리에 순종해야 더 넓은 자리를 주신다고요. 맡겨진 자리에 순종해야 더 큰 자리를 주시고, 주어진 자리에 순종해야 더 성장한다고 말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영적 회복의 첫 번째 키워드죠.
오늘은 두 번째 키워드를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고향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절기를 지켰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것도 기록되어 있는 절기는 다 지켰다고요. 이는 단순히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말씀을 우리가 현실에 적용시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데요. 그래서 설교 또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입각해서 말씀을 적용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10절 이하에서 찾고 싶습니다. 10절 이하에 보면 찬양을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이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말이죠. 이는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찬양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배를 위해 모여 경건히 드리는 찬양도 아니죠. 이런 모습이라면 비슷할까요? 옛날 우리나라의 농경사회를 떠올려 보세요. 마을 전체가 모여서 농사를 짓습니다. 혹은 건축을 하기도 하고요. 그때, 이런 소리가 들리죠. "에헤라디야..." "어기야 디야 어기영차" "어기야 얼쑤~” 이런 소리들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대부분 농사를 지으면서 힘든 농사 일을 흥겹고 신명나게 하기 위해서 함께 부르며 일을 했던 우리 어르신들의 노동요들입니다. 저도 힘든 일을 함께 할 때 "영차 영차~" 하며 소리를 내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면 참 신기하게도 힘든 일을 재밌고 금방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은 신명난 분위기를 만들어 일을 함에 있어서 공동체의 힘을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이 딱 이런 모습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폐허가 된 옛 성전 터에 섰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자리에, 더우기 70년이 지났으니 그 자리는 어쩌면 폐허의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돌보지 않은 땅, 손길이 가지 않았던 땅을 다시 개간하고 기초를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폐허의 땅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명령을 받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눈 앞에 보이는 상상이상의 환경 속에서 오히려 절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결심하고 호기롭게 나서죠. 저도 개척을 할 때, 무척 호기로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개척을 하는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실은 현실이라고 하는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이전 결심과 의지가 흔들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다짐하고 결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환경과 상황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의지는 꺾기고, 의욕은 떨어졌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을 했는데 눈 앞에 거대한 홍해가 놓이면 금새 결심은 사라지고 불평과 후회가 몰려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우리들은 많은 어려움에 놓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녹녹치 않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일을 행할 영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폐허 앞에서 이스라엘은 낙심만 하지 않았고, 전열을 정비하며 맡은 바 임무들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기초를 팔 삽을 들고 함께 찬양을 했습니다. 그 찬양은 다윗이 홀로 있을 때도, 도망다니면서 동굴에 갇혀있을 때도, 환란 가운데에서도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마치 우리나라 농민들이 일터에서 함께 불렀던 노동요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을 함께 이기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낙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영적인 활기의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영적인 결심은 주님 앞에서 혼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결심을 이루는 곳은 많은 사람과 환경의 분위기에 지배를 받습니다. 따라서 영적 결심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그 결심을 이룰 때까지 어떻게 영적 분위기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분위기를 만듭니다. 중요한 이야기이면 이야기일수록 그 말을 할 분위기가 중요해 집니다. 때론 장소도 골라야 하고, 같이 먹을 음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미리 사전 작업도 필요하고요. 어떨 때는 밤의 어둠이 필요하기도 하고, 사람이 드문 한적한 장소여야 하기도 하죠. 어느 때는 분위기가 이야기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분위기는 중요하죠.
예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 나왔다고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죠. 제가 잘 하는 말이 있죠. 예배는 시작하기도 전에 판가름이 난다고요. 이미 시작도 전에 예배의 진정성은 결정된다고 말입니다. 설교를 듣다가 졸리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미 설교는 졸릴 것이라고 하는 우리의 생각이 졸리게 만들 뿐이죠. 이미 예배 이전에 우리는 예배를 규정 짓습니다. 시작 전에 내가 예배를 어떻게 대할지가 결정되죠. 또 이런 말도 자주 드리죠. 어깨를 펴고, 표정을 밝게 만들고, 저와 눈도 마주치자고요. 그렇게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예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화로 말씀드린 실험과 똑같지 않습니까? 이미 지쳐있고, 이미 귀를 닫고, 이미 힘이 빠져 있는데, 설교가 들릴리가 있습니까?
여자 집사님들이 종종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남편과 대화가 잘 안 된다고요. 남편이 자기와 대화를 잘 안 한데요. 무뚝뚝하데요. 때론 마음이 없어 보이기도 하데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다 무뚝뚝하죠. 섬세하지 못해서 마음도 잘 못 읽고, 센스도 없죠. 그런데 혹시 그런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남편이, 혹은 상대방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내가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말이에요. 일방적으로 혼내기만 하고, 가르치려만 들지 않았습니까? 이 또한 남자들은 여자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사실인데요. 말만 꺼내면 아니라고 하고, 무슨 제안만 하면 무시하고, 외식하러 나와서 뭘 먹을까 묻고는 결국 메뉴는 자기 마음대로 고르면, 무슨 말을 하고 싶겠어요? 말을 잘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과의 영적인 분위기로 만든다는 의미인지도 몰라요. 늘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찬양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늘 내 마음을 주님께 묶어 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해요. 가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음악을 듣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에요. 왜 찬양을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찬양을 듣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이유도 주님과의 텐션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잊어버리고 말기 때문이죠.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히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하는 그런 모습의 일화가 아닙니다.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의미하는 것이죠. 우울한 분위기를 지속하면 정상인도 우울해 집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 늘 불안감과 공격성을 띄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들은 노래가 나도 모르게 하루종일 흥얼거리게 되듯, 아침의 영적 분위기가 하루를 좌우합니다. 또 그 하루가 한달을, 그 한달이 나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죠.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에서 살아가시겠습니까? 남이 만들어준 분위기에 의해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분위기를 만드시겠습니까? 힘찬 분위기를 만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우울하고 힘없는 분위기에 자신을 빠뜨리시겠습니까?
시편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처럼 내 영혼에게 명령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바로 영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란 분위기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영적 결심을 그들은 분위기로 뒤집으려 합니다. 우리는 찬양으로 영적분위기를 만들고, 기도로 분위기를 지배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함께함이 분위기를 만드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서로서로에게 격려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있는 자리에서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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