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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05 - 무너진것을 다시 세우십시오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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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서의 주된 주제는 회복입니다. 회복이란 잃었던 것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죠. 이미 말씀드렸지만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은 이 회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동행하던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잃고, 그 권리와 사명을 망각한 채 살아가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주님께 다시 돌아오는 과정, 이 구원의 과정이 곧 회복의 과정입니다. 다시 주님의 피조물로,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되돌아가는 역사죠. 그러니까 우리가 회복되는 과정이 바로 신앙의 과정인 셈입니다. 

에스라서 3장에서는 드디어, 70년의 나라 잃은 시절을 뒤로하고 다시 고향 땅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복 프로젝트를 가동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거창해서 프로젝트지, 누구나 다 이런 프로젝트를 실행합니다. 대규모 사업같은 무슨 대기업의 커다란 프로젝트만이 프로젝트는 아니고요. 마음 먹고 집안 대청소를 하는 것도 일종의 프로젝트죠.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반드시 목표가 있기 마련이죠. 왜 이 프로젝트를 하는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가 먼저 결정됩니다. 예를 든 것처럼 청소를 할 때도 이 청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청소를 통해 집안을 깨끗하게 하겠어~’에서부터 ‘이번엔 반드시 옷을 정리하고 말거야’라든지, ‘방의 구조를 바꿔보겠어’ 등의 계획들이 있죠. 이것들을 정리하면 프로젝트 기획이 됩니다. 제목은 [봄맞이 대청소]로 잡고요. 시간계획도 적어놓습니다. 물론 예산도 짜고요. 청소날이니까 오늘 점심은 자장면으로 하죠. 그리고 꼭 해야할 일을 키워드로 적어 놓습니다. 옷정리, 구조변경, 바닥코팅 등 핵심 사항들을 적어놓으면 프로젝트 기획안이 되는 거죠. 

오늘 본문을 통해 이 회복프로젝트의 목표가 될만한 키워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3가지 인데요. 바로 다시 세우고(Rebuilding), 지키고(Keeping), 드리는 것(Offering)입니다. 죄송하지만 따라해 보실까요? 세우고, 지키고, 드리자. 이것은 영적 회복의 대단히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오늘 저는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이스라엘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웁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건축물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간다는 의미이며, 그와 친밀함을 유지한다는 의미죠. 많은 이들이 예배한다는 것을 교회 나온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그분과 늘 동행하겠다는 결정이죠. 이스라엘은 그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길 원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나오는 것인가요?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합니까? 

우리는 친한 사람들에게 더욱 상처를 크게 받습니다.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상처받지 않으시죠? 오히려 아는 척하면 더 이상하려나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 보고도 그냥 지나가면 상처받죠. 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족이니까요. 분명히 가족인데 마음이 없어보이니까요. 분명 특별한 관계인데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죠. 아무리 같이 있어도,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마음이 없으면 느껴집니다. 마음이 떠나면 자신은 몰라도 상대방은 알아요. 행동에서 다 드러나고, 표정에서 다 드러나거든요. 그러면 상처를 받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상처를 받으십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외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이 없기 때문이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랜동안 나라를 잃는 설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와 맨 처음 한 일이 바로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맨 처음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죠.

금요일 가정예배를 위해 간단한 자료를 만들어 드리고 있는데요. 저는 그 자료들을 적으면서 여러분에게 예배의 중심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예배가 과연 무엇인지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자료를 만들면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있었어요. 누누히 제가 말씀드리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정예배가 시간만 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많은 아빠들이 그런 말을 해요. 아이들하고 관계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입니다. 아이들과 친해지기가 어렵다고 해요. 그것은 저에게도 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착각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남자이기 때문인 줄만 알았어요. 남자가 아이를 키우고, 재우고,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어요. 심지어는 그런 것은 엄마의 권한인 줄 알았어요. 이것이 대단한 착각이더라고요. 제가 아이들과 친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남자여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내 일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자녀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아빠들이 많죠. 그런데도 아이들은 늘 어렵고, 힘들고, 가까워지지 않으시죠? 왜일까요? 혹시 시간은 보내고 있지만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내가 시켜서, 눈치 보여서 마지못해 하고 있어서는 아닐까요? 내가 할 일도 아니고, 그저 의무감으로, 그저 책임감으로 그 일을 한다면 아이가 모를까요? 마치 교인을 그저 의무감으로, 그저 책임감으로 사역하는 목사가 있다면 교인들이 모를까요? 

지난주, 저는 진짜 우리가 가정예배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자녀에게 일주일동안 마음도, 시간도, 열정도 주지 않던 아빠가 가정예배에서 자녀를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사랑을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그 사랑한다는 말에 오히려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요. 거짓말처럼 느껴지니까요. 그것이 쌓이면 어떨까요? 그래서 예배를 하기 위해서는 저는 아빠로서 품위유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자녀들이 믿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예배하자고 말하는 부모에게, 교회가자고 말하는 부모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 나가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녀들에게 매력있는 아빠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빠의 말이 권위가 있으니까요. 공부하라고 말하기 전에 공부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고, 운동하라고 말하기 전에 운동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죠. 너무 나간 예이지만 제가 일주일 내내 허랑방탕에, 막말을 늘어놓으며 살다가 이 자리에 와서 거룩하게 ‘할렐루야’ 외치면 은혜가 될까요? 아마 더 역겨우시겠죠? 그래서 예배는 일주일 내내 지속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 하루를 위해서 아빠가 일주일 내내 예배 인도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가 가정예배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예배 하나가 나의 일주일을 어떻게 살지 정하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직장에서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전도가 잘 안된다고요? 왜 그럴까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요?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요? 설마요. 그것보다 내 자신이 복음이 아니어서는 아닐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고, 그리스도인임을 만방에 공개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살게 될까요?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가능할까요? 

조금 길지만 영화의 한 장면을 같이 보고 싶습니다. 영화의 요약입니다. 일반 영화이기 때문에 비속어들이 섞여 있는대요.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소거하지 않았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보시죠.

이 영화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회복입니다. 가난과 폭력 때문에 아들을 버렸던 엄마가 다시 엄마되는 것, 엄마를 원망하며 살던 아들이 다시 아들되는 것, 나와 다른 동생이 나의 동생되는 것, 그렇게 내게 주어진 자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회복,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복입니다. 어릴적 여러분도 꿈이 있었죠? 어린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하죠. 경찰관, 소방관, 간호사 이런 꿈을 이야기하죠. 저희 아이들도 그랬어요. 상민이의 첫 꿈은 소방관이었으니까요. 그 이유를 물으면 재미있어요. 남을 구해주고 싶다는 겁니다. 경찰이나 간호사도 그래요. 어려운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자 한다고요.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죠? 의사, 변호사 된다는 아이들도 있고, 연예인된다는 아이들도 있어요.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꿈을 가졌냐고 물으면 어떨까요? 아마도 돈 많이 벌고 유명해져서 그렇다고 생각하시죠?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통계에 보니까 연예인되고 싶은 이유에 가장 높은 순위는 나의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는 사람, 기쁨을 주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의사나 변호사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병을 고쳐주고, 남을 돕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어요. 아이들이니까 그래요. 여러분은 그런 모습에 아이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혹은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여러분이 변하고 꿈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고요? 여러분도 그런 꿈 꾸셨잖아요. 내가 꼭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 말입니다. 왜 그 꿈을 포기하셨어요? 왜 그 꿈은 사라졌습니까? 현실이 각박해서요? 뜻대로 되지 않아서요? 

처음 아내를, 혹은 남편을 만났을 때 기억하세요? 결혼식에 입장하면서 가졌던 마음 기억하세요? 뱃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처음 초음파로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를 기억하세요? 그때 어떤 마음이셨나요? 그 마음은 아직도 여러분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눈물과 함께 처음 하나님께 엎드렸던 기억이 있으시가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때,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그때, 아이가 아파서 살려달라고 처음으로 교회를 찾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었던 그때를 기억하세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직장 취업을 앞두고, 주님께 간구했던 때를 기억하세요?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고, 그렇게 취업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고백하던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그 때의 그 마음이 지금도 살아계셔요? 처음 이 교회를 나오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라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명감이 있었던 그때. 교회 공간이 없어서, 7평 남짓 작은 오피스텔에 2~30명이 쭈그려 앉아 고난주간특별새벽기도회를 했던 그때, 그래도 즐겁고 기뻤던 그때, 새벽에 7인승 차에 15명씩 타고서도 즐겁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던 그 열정,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 저녁에 성경공부하면서 서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공감하고, 결단했던 그 열정은 아직 살아있나요? 무더위에 다른 사람들 다 피서가고 놀러가는데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지어준다며 뙤약볕에 얼굴 그슬려가며 목재 옮기고, 벽체 세우고, 먼지와 시멘트를 뒤집어쓰며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하던 그 때의 사명감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습니까? 

세월은 흘렀습니다. 우리의 나이와 상황도 옛날과 다르죠.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고, 주님이 허락하신 일들은 여전히 있으며, 나에게 품으셨던 소망 또한 여전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듯이, 우리의 신앙과 사랑도 여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생명은 지켜야 하듯, 아무리 방해가 심해도 주님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형태는 달라지고, 방법은 달라질지라도 마음은 그대로여야 하죠. 그것이 우리가 치루는 영적인 전쟁이죠. 나의 무너진 첫 사랑, 무너진 첫 열정, 첫 마음을 다시 세우세요. 다른 어떤 계획도 필요없습니다. 무너진 것을 세우는 방법은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처음 시작한 그 첫사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복입니다. 너무 멀리 왔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작하세요. 나에게 처음 주셨던 마음부터 다시 세우세요.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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